[윤평중 칼럼] 신돈의 나라, 라스푸틴의 왕국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2016. 10. 28.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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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 막장극 앞에 국민 심정 갈갈이 찢기고 國格은 시궁창에 추락해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란 사실

총체적 혼돈이다. 사상 최악의 국정 농단 사태가 온 나라를 초토화하고 있다. 국가 극비 문건인 청와대 인사·회의 자료와 정부 외교·안보·군사·경제정책 문서를 사인(私人) 최순실이 사전에 '보고'받았다. 대통령 탄핵과 하야를 외치는 성난 민심 앞에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국가 지도자로서 그는 전면적 신뢰 상실의 재앙을 자초해 나라를 나락에 빠트렸다.

최순실 게이트는 희대의 요승(妖僧)인 고려 말 신돈(辛旽·?~1371)과 제정러시아 말기 라스푸틴(G Rasputin·1869~1916)을 연상케 한다. 이들은 왕과 황제의 무한 신임을 빌미로 권력 1인자로 나랏일을 전횡하다 국가를 망쳤다. 하지만 라스푸틴과 달리 신돈에겐 혁명가의 얼굴이 있다. 공민왕(1330~1374)이 신돈을 스승으로 삼아 과감한 개혁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신돈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은 기득권 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겨냥했다. 토지제도와 노비제도를 일신한 혁신 정책이 성공했더라면 왕조 재건에 탄력이 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돈의 권력 남용에 권문세족의 반발과 공민왕의 변심이 겹쳐져 신돈은 몰락한다.

라스푸틴에겐 신돈의 개혁적 면모가 전무했다. 정식 수도사이기는커녕 무식하고 방탕한 떠돌이 '돌중'에 지나지 않던 라스푸틴은 신비주의적 최면 요법으로 황후를 사로잡았다.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의 혈우병을 라스푸틴이 '치유'한 게 계기였다. 황제와 황후의 전폭적 신임을 업은 라스푸틴은 온갖 국사(國事)에 개입하고 포악한 중세(重稅) 정책으로 민중 폭동을 야기한다. 장관 인사를 좌지우지한 데다 전쟁터에 나간 황제에게 신의 현몽(現夢)을 내세워 군사작전까지 지시해 러시아군의 참패를 부른다. 한마디로 황제와 황후는 라스푸틴의 꼭두각시였다. 나라를 걱정한 황족들이 라스푸틴을 살해한 게 1916년 12월이었으나 로마노프 왕조는 정확히 두 달 후 붕괴한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신돈보다는 라스푸틴을 빼닮았다. 혹세무민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호가호위(狐假虎威)로 거부(巨富)를 일군 협잡꾼이다. 일제(日帝) 순사 출신인 최태민은 1970년대에 승려와 목사를 참칭했다. 불교·기독교·천도교 교리를 합친 '영혼합일법'(일종의 최면술)에 기초한 '영세계'(靈世界)를 주창했다. 스스로 미륵이자 태자 마마를 자칭하는 신흥 종교 교주가 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호된 질책에도 불구하고 고(故) 육영수 여사의 현몽을 앞세운 최태민을 평생의 '멘토'로 따랐다. 최태민을 승계한 최순실과도 '피보다 진한' 40년의 인연을 이어왔다. 그 결과가 최순실 게이트다.

미르와 K스포츠재단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최순실 사태의 핵심은 도대체 최순실이 어떤 존재이기에 대한민국의 국가 시스템 자체를 사유화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이화여대 같은 명문 사학 위에 왕처럼 군림했느냐 하는 의문이다. 그 답은 자명하다. 국가 극비 문서들을 청와대가 최순실에게 사전 '보고'한 사실이 입증하는 최순실의 실질적 '국정 기획과 결재 상황'이 모든 걸 설명한다. 최순실은 '한국의 라스푸틴' 최태민을 훨씬 넘어섰다.

박 대통령은 전무후무한 국기 문란 행위의 장본인으로 전락했다. 공적인 나랏일을 민간인 최순실과 함께 밀실에서 사유화함으로써 민주국가 시스템 전체를 파괴하고 주권자인 국민을 모독했다. 최순실 게이트의 막장극(劇) 앞에 시민들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다.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이 시궁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국가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이다. 무너진 나라를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가 최대의 국가 현안으로 등장했다.

혼군(昏君)이 지배하는 난세에는 간신과 내시가 설친다. 법치주의를 우롱한 '우병우 사태'에서 본 그대로다. 암군(暗君) 곁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의인(義人) 하나 없는 암흑의 시대다. 하지만 이런 어둠 속에서도 태양처럼 빛나는 사실이 엄존한다. 21세기 한국은 신돈의 나라가 아니다. 한국 시민은 라스푸틴의 왕국을 단호히 거부한다. 국가는 임기 5년의 공복(公僕)에 불과한 대통령의 소유물이 아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오로지 '국민 모두의 것'이다. 국가원수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박 대통령이 꾀할지도 모르는 어떠한 정치공학적 책략도 즉각 분쇄되어야 마땅하다. 헌법이 선언한 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나라의 주인은 결코 대통령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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