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시시각각] 위험한 정치, 어리석은 국민

전영기 2016. 7. 1.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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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영국이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한 뒤 일주일이 흘렀다. 이 시간을 관찰하면서 나는 세상에 세 가지가 없다는 걸 절감했다.

첫째, 공짜. 유럽연합(EU) 탈퇴파들은 그동안 “이민자는 거절하고 유럽 단일시장 접근은 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EU의 중심 인물인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의무 부담은 안 하면서 특권을 누릴 수 없다. 체리피킹(Cherry-picking·단물만 빨아먹기)은 안 된다”고 일축했다. 영국인은 번영과 영광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극심한 국론 분열과 국가 해체의 먹구름 앞에 놓였다.

둘째, 비밀. 탈퇴파들이 감추고 싶었던 진실이 드러났다. 그들은 “영국이 매주 3억5000만 파운드(약 5500억원)의 분담금을 EU로 보낸다. 그 돈을 국민보건 비용으로 돌리겠다”며 서민의 마음을 샀다. 그런데 3억5000만 파운드 중 2억 파운드를 EU 보조금으로 다시 회수한다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았다. 쓰는 돈만 부각하고 받는 돈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 정답. 국민의 과반수가 브렉시트를 결정했음에도 브렉시트를 취소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이 나온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분열과 고립을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 상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면 정답을 새로 써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의회가 국민투표의 결정을 ‘입법’하지 않거나 총리가 탈퇴를 ‘선언’하지 않으면 브렉시트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구차하지만 ‘국민투표 불장난이 국가의 영속성을 삼켜버리는 큰불로 번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실함이 배어 있다. 영국의 신뢰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세상에 공짜와 비밀, 정답이 없는 원리는 이처럼 국가 경영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브렉시트는 경제 시스템이 고장 나 생긴 위기가 아니다. 위험한 정치인과 어리석은 국민의 합작으로 태어난 정치 괴물이다. 국민투표로 할 일이 있고 그래선 안 되는 게 있다. 전쟁과 동맹, 역사와 미래, 정체성 문제는 국민투표로 정할 게 아니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고 고민하고 결정하라고 국왕과 의회, 정당과 총리 제도가 있는 것이다. 영국이 세계사에서 했던 가장 빛나는 기여는 아마 나치와의 전쟁일 것이다. 이 전쟁은 윈스턴 처칠의 고독한 결단과 의회의 결의로 수행됐다. 처칠은 전쟁 개시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지 않았다. 온전히 자기 책임으로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 나라를 구원했다. 여기에 필요한 건 정치력과 리더십이었다.

데이비드 캐머런은 선배 총리에게서 교훈을 못 얻었다. 그의 치명성은 자신이 결정해야 할 EU 탈퇴 문제를 국민에게 떠넘긴 데 있다. 그는 2015년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 내부의 공격과 극우당(영국독립당)의 보수표 잠식이라는 두 가지 도전에 시달렸다. 도전 세력은 대중의 분노에 올라타 EU 탈퇴를 선동했다. 캐머런은 탈퇴파와 잔류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했다. 그래서 나온 어정쩡한 공약이 ‘집권 1년 뒤 국민투표’였다. 총리는 그때 잔류든 탈퇴든 입장을 분명히 정해 총선 민심의 판단을 받았어야 했다. 해야 할 시기에 판단을 유보하면 언제나 대가를 치른다. 브렉시트 투표는 ‘닥치고 집권!’밖에 모르는 정치인이 분노로 흥분 상태에 빠진 국민 앞에 국가 운명을 끌어들인 21세기 최악의 정치 이벤트였다.

정당의 존재 이유가 ‘오직 집권’ ‘선거 승리’일까. 아니다. 정치인들이 퍼뜨린 오래된 신화일 뿐이다. 오직 집권을 위해 국가를 볼모로 잡거나 선거 승리를 위해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당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선거에 이기고 나라를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캐머런 비극은 한국 정치한테 강 건너 불만은 아니다. 상상컨대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극우정당이 등장해 ‘한국도 핵무장!’으로 보수세력을 갈라놓는다면? 새누리당 후보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집권하면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공약해선 안 될 것이다. 찬반 간에 자기 입장을 확실히 정해 대선 민심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캐머런의 무책임한 정치, 영국인의 우악스러운 선택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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