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혈서
기생에게 홀딱 빠진 남자가 ‘사랑한다’는 혈서를 써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기생의 집을 다시 찾은 남자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남자가 “혈서까지 써주었는데 어찌 된 거냐”고 분기탱천하자 기생은 혈서를 가득 담은 보따리를 던졌다. “보따리에서 당신이 쓴 혈서 찾아가세요.”
웃자고 전해진 이야기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혈서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전하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혈서의 대상은 사랑하는 여인처럼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가치일 수도 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 김기룡·강기순 등 12명은 1909년 연해주에서 손가락을 끊어 혈서를 썼다. 혈서의 내용은 ‘대한독립’이었다.
남자현 선생은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조사하러 하얼빈에 도착하자 손가락을 끊어 붉은 피로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란 글씨를 써 전하려 했다.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뜻이다. 독립군의 어머니로 통했던 남자현 선생은 사분오열된 독립군의 통합을 독려하려고 혈서를 쓴 적도 있었다. 구한말의 우국지사 송주면 선생은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우리의 땅을 내놓으라’는 혈서를 통감부에 보낸 뒤 절명시 5수를 남기고 순절했다.
일제가 대륙침략에 광분하던 1930년대 말부터 혈서의 대상이 달라진다. ‘국가에 충성하려고 지원한 육군 응모자 7만9602명 가운데 혈서로 지원한 사람이 110명이었다’는 기사(동아일보 1940년 2월13일자)가 보인다. 3년 전인 1937년 보통학교생 5명이 황군(일본군)의 분투에 감동해서 혈서로 일장기를 만들어 선생에게 보여준 일이 있다. 그러자 선생은 즉석에서 혈서로 ‘천황폐하 만세!’를 써서 화답했다(동아일보 1937년 12월8일자).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박정희군(23)이 ‘一死以テ御奉公(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한다)’이라는 혈서를 쓰고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했다”는 1939년 3월31일자 만주신문을 찾아냈다. 이를 두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퍼뜨린 날조’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소송에서 패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역사는 지울수록 더 선명해진다는 교훈을 또 한번 새긴다.
<이기환 논설위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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