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의 수하한화] 학술원과 예술원은 왜 침묵하고 있나

녹색평론 발행인 2015. 10. 2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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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쓸데없는 평지풍파를 일으켜놓은 장본인이 국회에 나와서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하고…더 이상 왜곡과 혼란이 없어야 한다”고 또다시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을 하고 있다. 보편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시대착오적인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면서 그것을 ‘비정상의 정상화’ 작업이라고 우기는 논리적, 심리적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또, 제1야당 의원이라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저 행태는 무엇인가? ‘국가수반에 대한 예우’는 지켜야 한다면서 그 모욕적인 발언을 ‘국정 교과서 반대’라고 적힌 종이 팻말을 들고 그냥 무기력하게 앉아 듣고만 있는 저 한심한 모습 말이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 박수는 치지 않았다니 참 대단한 무훈을 세웠다고 말해줘야 할 것인가?

대통령(그리고 그 측근들)뿐만 아니라 야당정치가들은 지금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과서 국정화로 인해 교과서 내용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게 아니라, 국정화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1조1항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명백한 위헌적 행위라는 점이다.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는 교과서를 갖고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옳은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지금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게 있다. 그것은 헌법을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서하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충격적인 것은, 대통령의 기억 상실 증상이다. 일찍이 역사문제에 국가가 개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료한 견해를 밝힌 것은 현 대통령 자신이었다. 불과 10년 전 당시 야당 대표의 신분으로 그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라는 너무나 지당한 논리를 폈던 것이다(<시사IN>423호). 뿐만 아니라 현 집권당 자신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도 바로 재작년(2013년 11월)의 보고서에서 “(교과서) 국정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권위주의 내지 독재국가”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우리나라도 검정제로 발행한 교과서가 국정제로 만든 교과서보다 질적 수준이 제고되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니까 지금 정부의 교과서 국정화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기보다도 전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역사학자, 지식인, 교양인, 상식을 존중하는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일을 계속 추진한다는 것은 이 정권이 ‘독재정권’이 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반대자들에게 ‘비국민’이니 ‘종북’이니 딱지를 붙이는 게 얼토당토 않는 짓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잘 알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다 아는 ‘보수적’ 인사들 다수도 교과서 국정화만은 허용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종북’이라는 게 ‘북한 따라하기’를 뜻한다면, ‘종북세력’은 교과서 국정화를 획책하는 자들이지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일 리 없다. 지금 이 나라 대부분의 학자, 지식인, 양식있는 시민들은 학문과 사상과 교육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진실에 도달하려는 학문공동체의 오래된 상식을 지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좌파, 우파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가르칠 것인지를 국가권력이 독점하고 있는 ‘북한식’ 체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의 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맹렬히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는 사상과 학문, 언론, 교육의 자유를 억압하는 북한식 독재체제에서는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6년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해방 후 70년, 대한민국은 끊임없이 ‘정통성’ 문제에 시달려왔다. 왜냐하면 만천하가 다 알 듯이, 다수의 일제부역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자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대한민국의 중추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국익 혹은 공익으로 포장하며 계속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정통성’의 기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친일세력 청산 여부도 중요하지만, 해방 70년이 경과하는 이 시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상대적이지만 어느 쪽이 더 보편적인 인간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로 전개됐느냐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19와 6월 항쟁, 광주항쟁이라는 민중의 피나는 싸움을 통해서 어느 정도마나 민주주의적 제도와 관행이 성립되어온 남한이 보다 ‘정통성’을 확보한 사회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 교과서 국정화에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이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가 수구 지배세력에 의해서 유린되고 파괴되는 정도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치스가 집권을 하자마자 착수한 첫 번째 사업이 독일어사전 변경작업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리하르트 페크룬이 1933년에 편찬하여 반세기 이상 독일에서 가장 널리 애용된 사전(‘도이체보르트’)에는 애초에 ‘국가사회주의(나치스)’에 대한 정의가 “극우적인 독일의 한 정당의 세계관”이라고 돼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수상이 된 후 1934년의 개정판에는 “독일민족민중의 해방을 가져온 세계관. 피와 땅, 충성과 전우애라는 근본개념에 기초하고 있다”라는 설명으로 바뀐 것이다.

독재 혹은 파쇼정권의 특징은 무엇보다 그 반지성주의이다. 그들은 인간문화가 힘들여 쌓아온 이성과 상식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학자, 지식인, 양심적인 시민을 언제나 적으로 간주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이 시점에서 내게 가장 궁금한 게 있다. 그것은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이 정권의 반지성주의적, 반문명적인 행태에 대해서 이 나라 최고의 지성인, 예술가들이 모여 있다고 하는(게다가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고 있는) 대한민국학술원과 예술원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민주주의의 존망이 걸린 이 중대한 상황에서 침묵하고 있는가?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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