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창]미안해요, 베트남

이정우 | 경북대 교수·경제학 2015. 4. 2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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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베트남 종전 40년, 한국군 참전 50년이 되는 해다. 내일이 바로 베트남 종전 40주년 기념일이다. 얼마 전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을 다녀갔다. 베트남 전쟁 때 온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아이들이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어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다. 이들은 서울, 부산, 대구에서 강연회를 가졌는데, 가는 곳마다 참전군인들이 대규모 반대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일정은 순탄치 못했다.

런 아저씨는 당시 10대 소년이었다. 한국군이 마을에 들어와 동네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한국군이 노인, 여자, 아이들을 향해 던진 수류탄이 폭발해서 런 소년은 중상을 입고 고통에 신음했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 것은 같이 있던 엄마와 누이동생이 그날 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차례로 죽어 거적에 실려 나가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런 아저씨는 엄마 이야기를 할 때면 목이 멘다.

탄 아주머니는 당시 8살이었다. 어느 날 한국군이 마을에 들어왔다. 엄마는 시장에 장사하러 가고 이모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무차별 학살로 마을 사람들이 거의 몰살당했고, 이모와 아이들도 죽었다. 가족 중 생존자는 탄과 오빠뿐이었는데, 오빠는 총에 맞아 엉덩이가 날아갔고, 탄 역시 총을 맞아 창자가 쏟아져나왔다. 남매는 총상을 입은 채 엄마를 찾으러 사력을 다해 땅을 기어갔는데, 애타게 찾던 엄마는 실은 그들이 기어가던 길가 언저리에서 죽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남매가 가장 애통해 하는 것은 그 길가 풀숲 어딘가에 엄마의 시신이 있었는데 못 보고 지나쳐버린 점이다.

탄 아주머니는 당시 상황을 300명 앞에서 울면서 이야기했는데, 좌중의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특히 탄 아주머니가 "나는 한국에 오면 한국 군인들이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며 펑펑 울 때 강연장은 거의 울음바다가 됐다. 그날 클라이맥스는 강연 뒤에 왔다. 청중석에는 젊은 시절 월남전에 참전했던 명진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오대산에서 베트남 강연회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강연이 끝나고 사회자가 명진 스님에게 소감 한마디를 요청했다. 침묵하던 명진 스님이 갑자기 뚜벅뚜벅 걸어 나가더니 흰 승복을 입은 채 베트남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합장해서 사과했다. 예상 밖의 상황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탄 아주머니가 황급히 달려나와 스님을 일으켜 세웠다. 스님은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는데, 주위가 소란해서 들리지는 않았다. 순간 폴란드 학살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했던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생각났다. 그날 명진 스님은 인간의 양심을 보여주었다.

강연장 밖에서는 고엽제 피해 노병들이 군복을 입고 강연회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날은 하필 4월9일이었는데, 시위 장소가 경북대 교정의 여정남추모공원이었다. 정확히 40년 전 4월9일은 당시 경북대 정외과 학생 여정남 등 인혁당 8명이 무고하게 처형당한 날이었고, 그날을 국제법학회에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했으며, 시위 직전 바로 그 자리에서 여정남추모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노병들은 까마득히 몰랐으리라.

나는 10년 전쯤 정부에서 일할 때 공식 방문단의 일원으로 베트남에 간 적이 있다. 출발 직전 외교부 공무원 두 명이 내 사무실에 찾아와 부탁하기를 베트남에 가면 과거사에 대해 절대로 사과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아주 강해서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한다고 설명했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런가 여기고 한마디 사과 없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게 큰 실수였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지난해 여름 다시 베트남에 가게 됐는데 한국군에 양민이 학살된 마을을 몇 군데 돌아보며 많이 울었다. 한국군증오비가 서 있는 마을이 무려 60여개나 있다.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희생자들은 모두 노인, 여자, 아이들이다. 이런데도 양민 학살이 없었다고 우기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외교부 방침은 양심과 정의에 어긋나므로 명백히 잘못됐다. 우리가 과거사를 인정, 사과하지 않고 어찌 일본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오늘 아베 총리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한다. 과연 과거사에 대해 진심어린 사죄를 할지 의문이다. 그가 교묘한 영어 단어를 사용해 호도할 것이란 추측 보도가 나온다. 200년 전 나폴레옹은 조선이란 나라가 한번도 외국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감탄하며 꼭 한번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그만큼 평화를 사랑했던 우리 민족에게 지금 역사는 준엄하게 묻고 있다. 빌리 브란트의 길이냐, 아베 신조의 길이냐?

<이정우 |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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