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대기업은 위기다

고현곤 2015. 4. 20.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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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친구 K는 순둥이였다. 반정부 시위가 있는 날도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했다. 행정고시에 몇 차례 낙방했으나 취업은 별 문제 없었다. 1980년대 후반은 3저(저달러·저금리·저유가) 호황으로 일자리가 넘쳤다. 시험도 안 보고 기업을 골라 가던 시절이었다.

 K는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갔다. 친구들 만나면 늘 회사 자랑을 했다. 경쟁이 치열했던지 2008년 부장을 끝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조그만 기업에 들어갔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연락이 끊긴 지 5년여 만에 그를 만났다.

 "신도시에서 콩나물 국밥집을 해. 음식점을 몇 차례 실패해 빚이 좀 있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해. 나와 집사람 인건비는 건져. 아들은 안산에 있는 조그만 벤처에 취직했어. 정규직인데, 웬만한 기업 비정규직보다 월급이 적어. 고민이 많더군. (중략) 대기업에서 나와 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야. 힘들었어. 정치인·공무원·교수들은 물정 모르고 떠드는 거지. 당신 같은 언론인도 마찬가지고.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생기고, 나라도 부강해진다고 믿었는데…. 솔직히 지금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어. 대기업이 잘나가면 그 회사 직원들만 좋은 게 아닌가."

 풍파를 겪은 탓인지 K는 냉소적이었다.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착잡했다. 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은퇴 대열에 들어서는 720만 명의 베이비부머(1955~63년생)가 K의 전철을 밟고 있거나 밟을 것이다. 2차 베이비부머(68∼74년생) 600만 명이 그 뒤를 잇는다. 먹고살기 위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진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들은 K보다 더 고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수록 대기업에 대한 질시와 증오가 커질 것이다. 취업에 좌절한 젊은이까지 가세하면 반기업 정서의 토양은 사방에 퍼져 있는 셈이다.

 예전엔 대기업이 성장의 견인차로 인정받았다. '국민과 같이 간다'는 느낌이 있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대기업이 일자리를 많이 만들지 못한다. 전체 근로자 가운데 대기업 정규직은 10%에 그친다. 대기업 성장이 중소기업으로 파급되는 이른바 낙수효과도 확 줄었다.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대기업 정규직이 100의 임금을 받으면 중소기업 정규직은 53, 비정규직은 36을 받는다.

 대기업은 위기다. '국가대표 기업을 키우자'는 슬로건이 잘 먹히지 않는다. '국가대표 기업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냉소가 깔려 있다. 이명박 정부는 민심의 이런 변화를 읽지 못해 집권 내내 고전했다. 실용을 중시하고, 친기업을 외쳤지만 국민은 냉랭했다. 집권 중반기에 부랴부랴 동반성장을 꺼내들었으나 민심을 돌려놓지 못했다.

 이를 지켜본 박근혜 후보 진영은 2012년 대선 때 경제민주화 공약을 들고나왔다. 단박에 국민의 편이라는 느낌을 줬다. 득표에 도움이 됐다. 2017년 대선에선 여야 막론하고 기업에 대한 압박을 늘릴 게 틀림없다. '경제는 중도'가 유행처럼 번질 가능성이 있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최근 "가진 자, 대기업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과 중산층 편에 서겠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작 당사자인 대기업은 위기를 못 느끼는 것 같다. 주장하는 논리가 구태의연하다. '기업이 있어야 근로자도 있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일자리가 생긴다' '반기업 정서 때문에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간다'…. 맞는 말이지만, 소외된 국민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 기득권을 공고하게 지키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심지어 범법 행위를 해놓고도 대외신인도가 하락하고, 해외수주가 감소한다는 주장을 펴는 곳도 있다. 사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논리다. 경남기업 같은 정경유착이 국민을 참담하게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열심히 국밥을 나르는 K는 '성완종 파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기업은 열심히 하는데, 국민이 오해하는 게 많다. 정부와 정치인은 인기에 영합한 반기업 정책을 쓴다. 대국민 홍보와 경제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는 반기업 정서를 누그러뜨릴 수 없다.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한 단체나 학자들은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게 낫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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