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권모칼럼]맹목의 '기호 2번' 신앙

양권모 논설위원 2014. 3. 27.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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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인사들에게 역시 '2번' 신앙은 절대적이다. 기초선거에서 무공천으로 '기호 2번'이 사라지면 전멸을 당할 것이라고 아우성이다. 기호 2번이 있어야 광역단체장부터 기초의원 선거까지 야당 지지자들의 줄투표가 성사된다는 계산이다. 유권자들이 기초선거 후보자를 잘 몰라 정당 기호가 사라지면 선택이 왜곡된다는 논지도 덧붙여진다. 실로 기호 2번은 '민주당'에 생존부호 같은 것이다. 김상곤 경기지사 예비후보가 어제 제기한 정당 후보자 기호순번제의 폐지가 이뤄지지 않은 것도, 새누리당 못잖게 기호 2번의 특권을 버리지 못하는 민주당 탓이 크다. 2010년 이명박 정부의 사회통합위원회가 '지역주의 문제의 제도적 극복 방안'으로 기호순번제 폐지를 국회에 제안했다. 최종 입법단계에서 정당정치에 어긋난다는 핑계로 좌초됐지만, 실은 거대 여야 정당이 누리는 선거 기호의 이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기초선거 무공천 약속을 한 번 지킨 적이 있다. 지난해 4·24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은 기초선거(단체장 2곳, 의원 3곳)에서 무공천을 했다. 경기 가평군수 선거에는 '기호 2번'의 민주당 후보와 '기호 1번'을 쓰지 못한 4명의 친여 성향 무소속 후보가 출마했다. 수도권인 서울 서대문과 경기 고양의 기초의원 선거도 마찬가지 구도였다. 민주당은 친여 후보의 난립과 표 분산의 반사이득으로, 단일화된 기호 2번의 선전을 기대했다. 하지만 '전멸'당한 것은 공천을 한 민주당이었다. 가평군수 선거에서 2번 후보는 4등을 했고, 야권이 유리할 것으로 예상된 수도권 기초선거에서도 무소속 후보들이 당선됐다.

'기호 2번'의 힘은 절로 생기지 않는다. 제1야당으로서 실력과 국민의 평가가 수반되어야 생긴다. 여당 지지율의 반토막도 안되는 제1야당은 백번 기호 2번에 호소해도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2011년 서울시장 보선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의 선거 연패가 증명한다.

갓 출범한 새정치민주연합을 흔드는 기초 무공천 번복론은 새누리당과 공동 실행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원인무효라는 논리에 기반한다. 새누리당이 공천 폐지 약속을 파기한 만큼 혼자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약속을 깬 쪽은 유리하고, 약속을 지키는 쪽은 불리하다는 '역설'을 앞세운다.

일종의 선택적 망각증이다. 분명 신당의 기초 무공천 약속은 새누리당의 무공천을 전제로 한 게 아니다. 새누리당은 진즉 기초 공천을 결정했다. 신당은 홀로 무공천했을 때 불리와 혼선을 감내하고, '약속의 정치'를 실천한다는 대의를 선택한 것이다. 김한길 대표는 지난 2일 통합선언 때 "무공천 결단은 예견된 고통을 감당키로 한 것으로 약속의 정치를 실현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거기에 문재인 의원도 "적극 지지한다"고 했다. 애초 통합신당의 기치로 내건 '거짓 정치 대 약속 정치' 자체는 새누리당의 공약 파기를 상정했을 때 세워진다.

선명히 기억되는 그 약속을 대놓고 번복하자는 이유는 현실론이다. '기호 2번'의 울타리가 없으면 기초선거에서 전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막에는 다음 총선에서 수족처럼 활용해야 할 지방의원들에 대한 통제력을 놓지 않으려는 국회의원들의 이해도 작동할 터이다.

그렇다면 기초 무공천을 뒤집고 공천을 해서 '기호 2번'을 복원하면 지방선거에서 유리해진다고 믿는 것일까, 턱없다. 공천을 통해 기호 2번을 확보해 기초선거에서 얻을 '수확'과 통합신당이 절대 명분으로 내세운 약속을 저버린 데 따른 '후과'의 대차대조표는 뻔하다. 기초 무공천 번복은 '안철수 새정치'를 사기정치로 규정시키면서, 효용이 끝장나게 할 것이다. '안철수 지지층'이 이탈하면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율은 '도로 민주당' 수준으로 돌아간다. 그건 박원순 서울시장을 필두로 야당 광역단체장 후보들의 밑동을 흔들 재앙이다.

정치의 기본은 약속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정치는 존립하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이은 공약 파기는 책임정치를 형해화시켰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박 대통령의 약속 파기를 이유로 같이 약속 파기로 대응하는 것은 죽는 수다. 대국민 사기극의 주인공은 새누리당에서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바뀐다.

신당은 되지도 않는 기초 무공천 번복에 힘쓸 때가 아니다. 새누리당과 박 대통령의 기초공천 폐지 이행을 치열히 촉구하면서 국민들에게 불리를 감내하고 '약속의 정치'를 실천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약속 정치 대 거짓 정치'의 구도를 강렬히 세우고, '기호 2번'이 없는 선거에서 유권자들로 하여금 진성 후보를 선택케 하는 길이다.

< 양권모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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