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채동욱 트라우마' / 여현호

2014. 3. 1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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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어릴 적 개에게 크게 물린 일이 있다. 그 뒤부터 개가 싫었다. 아니, 무서웠다. 지금도 길에서 개를 마주치면 몸부터 긴장된다. 조그만 강아지가 멀찍이 보일 때도 '혹시 덤비면 걷어차야지'라고 먼저 마음을 다잡는다. 큰 개라면 가능한 한 거리를 두고 빨리 지나치고 싶다. 다 큰 지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이렇다.

지금 검찰에게 그런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지난해 9월 채동욱 전 총장 사퇴다. 그 상처는 아직도 아프고 선연하다. 채동욱 검찰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서 법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정원법상의 정치개입 혐의 외에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선거로 뽑힌 정권의 정당성을 의심받게 한 것이니 권력의 '역린'을 건드린 일이다. 정권 안보의 최첨병인 국정원과 공격적 수사로 정면 대결하는 모양새도 보였다. 그 와중에 채 전 총장은 처참하게 낙마했다. 사퇴의 빌미가 된 혼외아들 얘기를 누가 흘리고, 왜 그랬는지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고 또 확신한다. 수장이 사찰과 공작의 대상이 돼 비참하게 쫓겨난 기억은 검찰한테 지울 수 없는 흉터다.

호되게 물린 때문일까.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매우 조심스럽다. 수사에 바로 착수하는 대신 진상조사 형식을 먼저 밟았다. 수사 전환 뒤에도 한발 더 떼기를 주저한다. 위조 문서를 만든 국정원 협력자 김아무개씨에게 위조 사문서 행사 혐의는 적용했지만, 정작 국가보안법의 간첩 날조 혐의는 빼놓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 문서가 간첩 조작에 쓰인다는 것을 김씨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바로 날조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김씨의 행적을 보면 몰랐을 수도 없다. 그런데도 날조 혐의는 빠졌다. 비교하자면, 대통령선거 기간에 인터넷에 정치 관련 게시글과 댓글을 달아온 국정원 직원들에게 국정원법의 정치개입 혐의만 적용하고 선거법 위반은 빼놓자는 꼴 같다.

왜 그랬을까. 짐작은 해볼 수 있다. '날조'가 아니라 '사문서 위조 및 행사' 혐의가 적용되면 수사의 크기가 쪼그라들 수 있다. 사건은 '간첩 조작'이 아니라 '문서 조작' 문제가 된다. 협력자나 국정원 직원 한두 사람이 문서에 손을 댄 정도라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걱정했던 대로 민주주의의 근본이나 국기를 뒤흔드는 사건이 아니라, 그저 '개인적 일탈'이라는 주장도 또다시 튀어나올 법하다. 국가보안법을 큰 칼 삼아 휘둘러온 국정원은 창설 이래 처음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되는, 존립 기반의 일대 위기도 모면할 수 있다.

검찰이 그런 상황까지 내다봤는지는 분명치 않다. 물론, 나중에라도 혐의를 추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해의 눈길로 보면, 지금의 행보는 자칫 앙화를 부를 수도 있는 공격적 수사 대신 한층 신중한 접근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겁먹은 듯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잖아도 검찰 수뇌부 주변에선 "지난번처럼 조직 대 조직의 대결 구도로 가거나 국정원을 모욕하는 모습은 삼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검찰 자신도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터이니 댓글사건 때보다 더 크게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겠다. 악몽은 시시때때로 발목을 잡는다.

검찰이 선택의 갈림길에 선 것은 분명하다. 세계에 유례없게도 수사까지 맡은 정보기관이 어둠 속에서 뭔가 사건을 만들어오면 검찰은 그 틀 그대로 법적 절차의 처리만 하청업체처럼 대행해온, 수십년 해묵은 공안수사의 폐습은 그 자체로 기형이다. 그런 비정상이 국가의 형사사법체계를 오염시킨 사실이 이제 드러났는데도 미봉한 채 또 넘어간다면, 검찰은 트라우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검찰이 더는 비정상의 공범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 국정원의 조작과 날조를 묵인하거나 방조 혹은 공모한 게 사실이라면 자기 살부터 도려낼 일이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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