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임용한] 왜구 출몰 끊은 대마도 정벌의 교훈

2014. 2. 2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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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첫 번째 기사는 당연히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과 즉위 기사이다. 다음이 일식, 그 다음이 왕비인 알영의 탄생과 결혼, 그 다음인 4번째 기사가 왜구의 침공이다. 그만큼 한국은 오랫동안 왜구에 시달렸다. 그러나 무려 1600년 동안 조선의 왜구 대책은 방어 일변도였다. 14세기 중엽이 되자 왜구는 해적의 수준을 넘어 군사적 침공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왜구는 기병까지 거느린 군사편제를 갖추고 내륙으로 진입해 천안, 청주와 같은 내륙 도시까지 함락했다.

최무선이 화포를 발명하고, 고려의 해군력이 강화되면서 고려는 해전과 육전에서 왜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왜구가 내륙으로 들어와 무인지경으로 유린하는 사태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의 우세만으로는 왜구를 종식시킬 수는 없었다. 왜구는 히트 앤드 런으로 치고 빠지고, 조선군은 항상 당한 다음에 출동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방어만 하자 계속되는 노략질

왜구의 본거지는 규슈와 대마도, 이키와 같이 한국과 규슈 사이에 있는 섬이었다. 조선은 규슈와 대마도의 영주와 교섭해 왜구를 줄여보려고 노력했다. 특히 대마도의 영주 가문인 종씨 집안과는 빈번한 교류를 나누며 그의 협력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대마도가 중요했던 이유는 대마도 자체가 왜구의 소굴이기도 했지만, 당시는 항해술이 불안정해서 조선으로 건너오는 왜구는 반드시 대마도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납치된 조선인을 돌려받고 규슈나 대마도에서 스스로 왜구를 단속하는 등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왜구를 침체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마도는 대놓고 조선과 적대할 수는 없었으므로 찔끔찔끔 왜구 몇 명을 잡아 보내고, 자신들은 조선의 형제로 지내고자 한다는 등 외교적 수사와 제스처를 항상 보냈지만 왜구를 철저하게 단속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대마도가 해적의 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안선이 워낙 복잡해서 단속이 어렵기도 했지만 정박하는 왜구에게서 세를 거둘 정도로 왜구가 대마도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참다못한 상왕 태종과 세종이 1419년 5월 14일 대대적인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실록은 5월 초에 있었던 비인현 습격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대규모의 왜구 함대가 결성되어 중국을 목표로 출항했는데 풍랑으로 낙오한 일부 세력이 비인현을 습격했다. 이 기습에 조선군은 충청도 수군만호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보고를 받은 태종이 중국 원종으로 왜구가 출동한 틈을 타서 본거지인 대마도를 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계획이 단 하루 만에 결정되고 단기간에 원정군이 편성된 점으로 보아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대마도 정벌 계획은 고려 말의 수군 원수 정지에게서 처음 나왔고, 1389년 박위, 1396년 김사형의 주도로 이미 2번이나 시행됐다. 그러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대마도인에게 위기감을 줄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종은 제대로 된 원정을 구상했던 모양이다.

다만 원정을 시행할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는데, 조정의 책임 있는 신하 모두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반대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위험한 군사작전에 부담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반대론자들이 내놓는 대책은 모두 지금처럼 해안 경계를 강화하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대해 태종의 의견은 단호했다. "물리치지 않고 침노만 당한다면 욕을 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후일의 환란이 끝이 없을 것이다."

1419년 6월 19일 275척의 함대와 1만7000명의 조선군이 대마도로 출정했다. 조선군은 초토화 작전을 펴서 대마도의 주요 항구를 파괴했다. 대마도의 남북 교통을 차단하고, 장기주둔하려는 듯한 태도를 과시하면서 대마도의 수도를 고립시켜 도주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선박 2000척과 가옥 2000채를 파괴했다. 그러나 니이 전투에서 패전하여 조선군 100여 명이 전사하는 바람에 대마도주에게서 직접 항복은 받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 바람에 원정의 성과를 과소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군사행동과 외교는 눈앞의 성과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대마도 정벌이 끝난 후 대마도 내에서도 조선에 보복하자는 강경론과 온건론이 대립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와 조선의 강경한 태도에 놀란 대마도는 온건책으로 돌아섰고 왜구에 대한 단속도 강화했다. 조선이 이런 식으로 대마도 공격을 계속하면 대마도는 무엇으로도 피해를 상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벌후 약탈 사라지고 평화 정착

대마도의 태도가 바뀌자 세종은 삼포를 개항하고 일본과의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이후로 왜구는 중국으로는 계속 나갔지만 조선 약탈은 크게 진정되었다. 혹자는 대마도 정벌이라는 강경책이 아니라 삼포 무역의 활성화가 더 큰 효과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대마도 정벌이 있었기에 삼포 무역도 가능했다. 평화는 누구나 바라는 바다. 그러나 국가 간의 관계에서 강경책과 온건책은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정책이 아니다. 국격과 힘이 바탕이 될 때 온건책도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용한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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