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허위·과장 광고와 '대통령의 사과'

오창민 경제부 차장 2013. 10. 10.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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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참칫집이 새로 문을 열었다. 주인은 1만2900원만 내면 '무한 리필'로 참치를 먹을 수 있다고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예쁜 접시에 가득 담긴 분홍 참치회 광고 사진에 끌려 식당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낚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림표를 보니 '참치 특수부위 100g 3만3000원' '참다랑어 100g 2만5000원' '다랑어 100g 2만원' 등이 큰 글씨로 적혀 있었다. 직원이 "무제한으로 양껏 먹을 수 있는 참치도 있지만 신선하고 맛있는 참치를 먹으려면 차림표에서 골라야 한다"고 했다. 1만2900원 무한리필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던 셈이다. 속았다는 생각에 참치를 먹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식당에서 나왔고, 다시는 그 식당에 가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 식당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허위·과장 광고를 한 참칫집은 이런 식으로 응징하면 된다. 주인이나 직원과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이 식당에서 그냥 나오고, 다시 가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불매운동을 펼칠 수도 있다. 참치를 꼭 먹고 싶으면 다른 가게에 가면 된다. 근처에 다른 참칫집이 없을 땐 광어나 우럭같은 생선회를 대체재로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참칫집과 달리 정부의 허위·과장 광고는 대응 방법이 마땅찮다. 식당을 바꾸듯 한국 정부와 인연을 끊고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다니기도 어렵다. 무기력하지만 화를 삭이고 다음 선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인지 정부는 허위·과장 광고를 하고도 뒷일을 걱정하거나 국민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에서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소득의 많고 적음이나 부양가족 여부 등의 지급 조건을 달지 않았다. 선진국에 비해 열악한 수준인 노인 복지를 개선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말을 국민들은 믿었다. 평소 신뢰와 원칙을 중시한 박 대통령이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내년 예산에 기초연금 재원을 배정해야 할 때가 되자 말을 바꿨다. 소득 하위 70%에게 국민연금 가입기간과 연계해 차등지급하겠다고 했다.

기초연금 공약만이 아니다. 반값 등록금, 4대 중증질환(암·뇌혈관·심혈관·희귀난치성 질환) 진료비 전액 부담, 무상보육 등의 공약도 모두 당초 방안에서 대폭 후퇴했다. 경제민주화 공약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재벌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속빈 강정으로 전락했다. 규제 대상이 전체 재벌 계열사의 8%에 불과하고 그나마 효율성·보안성·긴급성이 인정되는 계열사 간 내부거래는 봐주기로 했다. 삼성에버랜드·현대글로비스·SKC & C 등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재벌의 핵심 계열사는 규제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124조원이 필요한 지역공약이 깨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민간자본 유치 운운하면서 공약을 이행하는 것처럼 하겠지만 선거일 투표함 개봉과 동시에 유야무야될 것이다.

뭐 그렇다고 치자. 정부에 속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정부 출범 6개월도 안돼 공수표가 된 이명박 정부의 '747공약(7% 경제성장률,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 건설)'도 경험했다. 오죽했으면 '빌 공'자 공약(空約)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경제가 어려워 공약 이행이 어려워졌다는 박 대통령의 변명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 전망이 빗나가 올 상반기에만 10조원의 세수 결손이 발생했다. 다만 대통령의 진심어린 사과라도 있었으면 했지만 이마저도 이뤄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기초연금 공약 파기에 따른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박 대통령은 대한노인회 관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이유를 설명하고 고개를 숙였다. 대한노인회 관계자들은 "경제 상황이 먼저고, 박 대통령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박 대통령을 두둔했다. 그러나 대한노인회 관계자들은 어르신들의 대표가 아니다. 월 20만원 기초연금이 없어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는 분들이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허위·과장 광고를 한 참칫집 주인이 손님들은 제쳐놓고 자신의 친구나 친척들을 불러 미안하다고 하면 과연 그것을 진실된 사과로 볼 수 있겠는가.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는 말도 있는데 참 안타깝다.

< 오창민 경제부 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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