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10월 8일] "반기문총장이 촌스럽다고?"
대학에서 영어교육학을 전공하고 서울 강남에서 15년째 초중등 영어 개인교습을 하는 베테랑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인사성 바르고 공부도 열심인 어느 초등 5년생이 하루는 잔뜩 골이 나있더란다. 이유를 물었더니 대뜸 "영어 만든 사람을 죽이고 싶어요!" 요즘 아이들 거친 언어습관이 낯선 건 아니지만 '죽이고 싶다'는 말이 섬뜩해 까닭을 물었더니 "듣기평가시험 망쳐서요" 였단다. 그 얘기를 듣고, 5년 전 "오렌지가 아니라 아륀지로 발음해야 외국인이 알아듣는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운 이명박 정부 인수위원장 이경숙 교수가 떠올랐다. 결국 '아륀지'주장은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영어에 목매다는 학부모‧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다.
최근 EBS의 한 프로그램이 화제였다. 초중등 자녀를 둔 학부모 10여명과 미국인 몇을 모아 놓고 한 동양인의 영어연설장면을 틀어줬다. 그의 발음은 미국식은 아니었다. 그이의 영어에 대해 의견을 물었더니 학부모 대부분은 "촌스럽다" "100점 만점에 40점"이라 답했다. 반면 미국인들은 "고급 단어로 의사를 정확히 전달한 수준 높은 영어"라고 입을 모았다. 조금 뒤 대 반전! 사람들 의견을 들은 뒤 TV화면은 반기문 유엔총장의 연설장면으로 바뀌었다. 제작진이 트릭을 쓴 거였다. 처음 보여준 동양인은 입만 뻥긋거렸고, 실제 내용은 반 총장의 유엔총장직 수락연설이었다. 학부모들, 몹시 겸연쩍어 했다.
우리는 '혀에 버터를 발라줘야' 훌륭한 영어로 대접하는 경향이 강하다. 미국식 발음에 대한 '집단적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 아이들은 원형탈모증까지 생기고, 학부모는 사교육비로 고통이 크지만 지불한 비용‧노력에 견줘 효과는 초라한 '국가적 악순환'을 언제까지 방치할 건가. 영어 사교육시장규모를 최대한 싼 비용으로 셈 해보자. 국내 학생의 약 70%는 초등4년부터 고3 때까지 8년간 영어사교육을 받고 있다. 전국적으로 약 30만명이 8년간 매달 25만원씩 쓴다고 치면 연간 7,500억원이다.(실은 훨씬 더 든다). 그 긴 세월 동안 큰 돈 들여 겨우 대학에 가도 외국인과 얘기 몇 마디 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휴학하고 외국 영어연수 가는 게 필수코스처럼 돼버렸다.
미국식 발음이어야 국제사회에서 대접받는가? 미안하지만 천만의 말씀. 세계적으로 보면, 미국식 발음보다는 '촌스러운' 발음기호 영어사용자가 더 많다. 영국식 영어권에선 미국식 발음 쓰면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 하기도 한다. 인도 젊은이들이 미국식 발음 유창해서 주요 선진국에 대우받으며 취업하는가?
필자는 수 년 전, 당시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의 영어는 발음기호 대로 천천히 말하는 '시골 영어'였다. 그가 서울 거리에서 시청 가는 길을 영어로 묻는다면, 한국인 대부분은 "아프리카에서 왔나? 영어가 참 형편 없군"이라고들 생각할 것이다. 코피 아난은 그 영어로 유엔총회도 주재하고 세계 각국 다니며 일 했지만, 영어 때문에 지장 받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사회와 정책담당자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통‧번역사처럼 영어 그 자체를 업으로 삼을 게 아니라면, 자기 생각 또박또박 말 하고, 외국인 말 한번에 못 알아 들을 땐 부끄러움 없이 "다시 한번 천천히 쉽게 말해 주겠느냐?"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으면 부족하지 않다고 본다. 이제 겨우 초등5년생에게 "영어 만든 사람 죽이고 싶다"는 철천지 '한'을 심어줘서야 되겠는가. 미국식 발음에서 해방시키자.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진짜 경쟁력은 버터발음이나 토익만점이 아니라 창조적 문제해결능력이란 건 주요 기업들의 사원 선발과정이 웅변하고 있다.
기초연금 등 주요공약의 파기로 박근혜정부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새정부 공약 중 '공교육시스템복원'도 있다. 공교육 내실화는 계층‧신분상승의 핵심고리이자, 사회통합의 출발점이다. 아이들과 학부모를 영어지옥에서 해방시킨다면, 공약 중 하나는 해결했다며 박수 받을 것이다. 이명박정부 '아륀지'는 진작에 실패했다. 반면교사, 멀리서 찾을 일 아니다.
이강윤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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