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시선]'설국열차'의 상징과 비유들

박민영 | 문화평론가 2013. 8. 26. 21:3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설국열차 > 가 개봉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관객 수는 800만이 넘었지만, 흥행이 다소 주춤한 모양새다.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영화가 난해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반응이 흥행에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사실 < 설국열차 > 만큼 상징과 비유가 풍부한 영화도 흔치 않다. 아마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풍부한 듯하다.

영화 속 기차는 '자본주의 체제'를 상징한다. 봉준호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차는 옛날로 치자면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은 영국 산업혁명의 대명사 격으로 자본주의를 있게 한 핵심 요소다." 전 세계를 휩쓸고 다니는 자본이라는 엔진은 자기 내부의 모순으로 스스로 폭발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기차는 전 세계를 국경 없이 질주하며 부의 무한증식을 꾀하는 초국적 자본을 닮아있기도 하다.

기차는 폐쇄된 공간이다. 기차는 터널처럼 앞뒤로의 이동만을 허락한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골몰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앞 칸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가 된다. '앞 칸으로의 전진'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반란이면서 계급상승, 즉 출세와 성공도 의미한다. 지배자 윌포드는 봉기를 주도해 엔진 칸까지 도달한 커티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꼬리 칸에서 엔진 칸까지 모든 열차 칸을 거쳐 온 사람은 너뿐이었다." 윌포드는 늙은 자신을 대신해 지배자가 될 것을 제안한다.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커티스는 꼬리 칸 출신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꼬리 칸 아이들이 엔진 부품으로 이용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세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엔진의 신화에 세뇌되고, 계급적 위계에 길들여지면 사람이 하나의 기계 부품으로서 얼마든지 기존 시스템을 위해 성실하게 복무할 수 있다는 것. 둘째, '엔진은 완전하고 영원하다'는 윌포드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것. 선전과 달리 결함을 꼬리 칸 아이들이 메워야 할 정도로 엔진은 불완전하다. 셋째, 기차를 움직이는 엔진의 동력이 실은 꼬리 칸에서 나온다는 것. 꼬리 칸은 사람들은 시스템 유지에 필요한 거대한 인력 풀이다.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대목은 '꼬리 칸의 정신적 지도자인 길리엄이 왜 윌포드에게 협력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영화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 길리엄은 꼬리 칸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서로 잡아먹을 때, 스스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잘라서 내놓았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윌포드의 간첩일 리는 없다. 그가 꼬리 칸 사람들을 사랑한 것도 맞다. 길리엄의 협조는 보다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이해돼야 한다.

영화 종반부 윌포드는 아수라장이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커티스에게 말한다. "저것을 보라. 저것이 혼돈이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길리엄 역시 꼬리 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고, 질서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윌포드와 길리엄은 홉스의 세계관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길리엄 역시 열차 시스템이 붕괴되면 모두 공멸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그것이 길리엄이 협조한 이유이다.

윌포드와 길리엄이 한편이라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정치를 바둑에 비유하면 이렇다. 검은 돌을 진보, 흰 돌을 보수라 하자. 그런데 만약 검은 돌과 흰 돌을 한 사람이 놓는다면 어떨까? 그가 바둑판을 구경하는 대중의 반응을 살펴가며 흰 돌이 이기게도 하고, 검은 돌이 이기게도 한다면? 황당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이런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 거대 자본이 정치의 배후에서 시의적절하게 보수도 지원하고, 진보도 지원한다. 설사 길리엄 같은 지도자가 집권한다 해도 자본의 통제 하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기차 보안설계자 남궁민수는 '지식인'으로 해석 가능하다. 그는 열차의 구조와 각 칸의 출입문 여는 방법 등 기차 시스템에 대한 핵심 지식을 알고 있다. 그는 기차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바깥 온도가 조금씩 상승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시스템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에 대한 관심은 지식인의 속성이다. 그의 딸 요나는 투시력을 갖고 있다. 투시력은 장애물을 뚫고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다. 요나의 투시력은 지식인의 통찰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낳을 수 있다는 은유로 읽힌다.

'기차를 벗어나면 죽음뿐'이라는 윌포드의 선전은 거짓이었다. 기차 밖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남궁민수는 기차를 폭파함으로써 요나와 티미에게 세계를 새롭게 건설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결국 진정한 혁명가는 커티스가 아니라 남궁민수였다.

< 박민영 | 문화평론가 >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