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태조 왕건을 '바지 사장'에 비유한 무한도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877~943). 후삼국의 혼란을 정리하고 새 시대를 연 역사 위인이다. 그런 왕건이 TV프로그램에서 느닷없이 '바지 사장'에 비유됐다. 11일 방영된 MBC 예능 프로 '무한도전' 중 멤버들이 한국사에 관해 배우는 장면에서 "(왕건을 추대한) 호족들이 각각 왕 행세를 했다"는 강사 설명에 멤버 하하 가 "약간 바지 사장 느낌으로?…'신세계' 영화를 보면 2인자를 위에 올린 느낌"이라고 응수한 부분이다.
'바지 사장'은 '회사의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명의만 빌려주는 사장'이라는 뜻의 속어(俗語)다. 주로 사기·횡령 같은 경제 범죄나 조직 폭력 사건 등 좋지 못한 경우에 등장한다.
하하의 발언이 웃음을 위해 일부러 연출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실제 본인의 지적(知的) 수준을 반영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적지 않은 어린이·청소년 시청자들이 단순히 '왕건=바지 사장'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태조 왕건이 개국 초기 호족세력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한 점은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이다. 그렇지만 왕건의 위대함은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평화적·점진적으로 왕권을 강화해 나간 화합의 리더십에 있다.
무한도전의 이날 방송분은 멤버들이 직접 역사를 배우고 강단에 서서 아이돌들을 가르치는 내용으로 진행됐다. 방송 후 MBC 홈페이지에도 재미와 공익성을 동시에 추구한 취지가 좋았다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하지만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방송 프로그램으로서 지켜야 할 품격과 책임이 있다. 역사 위인을 술자리 사담(私談)에서나 등장할 법한 속된 용어로 비유하는 출연자, 녹화 화면임에도 발언을 걸러내는 대신 자막까지 곁들여 돋보이도록 한 제작진의 태도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덤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웃자고 하는 일이 우리 역사일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과도한 엄숙주의는 지루하지만, 과도한 희화화는 우리의 자존감을 낮출 수 있다. 또 하나, 웃자고 하는 일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은 기자가 과문(寡聞)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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