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슬픈 아베'

2013. 5. 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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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지지율 업고 가면 벗은 日 총리휘호 '默而識之'에 담긴 뜻 되새기길

도고 시게노리라는 인물이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무대신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45년 8월 군부 반발에 맞서 일왕의 항복 결심을 끌어냈다. 고향 기념관에선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일본을 구했다"는 송덕비가 방문객을 맞는다. 실제로 도고가 없었다면 전후 운명의 실타래는 다르게 풀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한국계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의 후손인 그가 전범국을 구하고 그 자신은 A급 전범으로 2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사망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전후 일본의 활로를 연 한국계 지도자는 도고만이 아니다. 한국계 도공 집안으로 유명한 심수관 14대는 '슬픈 열도'의 저자 김충식(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토씨가 하는 말이 놀라웠어요. 나한테 '당신네는 일본에 온 지 얼마나 됐느냐'고 묻길래 400년 가까이 됐다고 했더니, '우리 가문은 그 후에 건너온 집안'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사토는 64년부터 72년까지 최장수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를 가리킨다. 증언이 사실이라면 사토는 한국계 핏줄을 가슴 깊이 새겼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거기서 끝날 문제도 아니다. 도고와 같은 A급 전범 출신으로 57∼60년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가 사토의 친형인 까닭이다. 전후 재건에 앞장선 두 정치인이 우리 핏줄이란 추론이 불가피하다.

요즘 동북아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아베 신조 총리다.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잃어버린 20년'의 고리를 끊겠다는 아베노믹스 파문도 크지만 옛 일제 망령을 되살리는 거친 언사가 더 민감하게 작용한다. 지구촌은 혀를 찬다. 백미는 파이낸셜타임스 반응이다. 지난달 28일 사설에서 "국가주의라는 악마를 제어해 왔던 아베 총리가 70%의 내각 지지율을 업고 가면을 벗었다"고 적나라하게 평했다. 일본 언론도 비판적이다. 아사히신문은 "최근 정치인 언동은 염려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오불관언이다. 미국 정부까지 나서자 "역사 인식에 관한 문제가 외교·정치 문제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 발 물러서긴 했다. 그러나 기본 입장은 여전히 파렴치하다. 레토릭부터 그렇다. 한 발 물러서면서도 "역사는 확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며 나는 신처럼 판단할 수 없다"는 황당한 사족을 다는 행태가 뭘 의미하는지 모를 사람이 없다. 국수주의 화로에 계속 부채질을 하겠다는 속내인 것이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는 기시 전 총리다. 기시, 사토 전 총리 가문이 한국계라면 아베 총리도 한국계일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비뚤어진 역사 인식' 바람을 선도하면서 국제 물의를 빚는 것을 어찌 봐야 하나.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다.

'논어'에 도청도설(塗聽塗說)이란 말이 나온다. 길에서 건성으로 듣고 떠드는 작태를 일컫는다. 공자는 덕을 버리는 작태라며 경계했다. 그와 대조되는 말도 '논어'에 나온다. 묵이지지(默而識之)다. 중국 베이징대 리링 교수에 따르면 지(識)는 기억으로, '말없이 기억한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이다.

아베의 작은 외할아버지 사토는 심수관 14대에게 휘호를 써줬다. 묵이지지, 네 글자 휘호였다. 사토는 "말로 하지 않아도, 묵묵히 있어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 통한다는 의미"라고 뜻풀이를 해줬다지만 휘호를 주고받은 두 사람 핏줄의 인연으로 미루어 각별한 행간의 의미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낯선 땅에서 새로 뿌리를 내리기에 안간힘을 써야 했던 한국계 후손들의 비애가 넘실거리는 감이 짙다.

정치는 냉혹한 현실이다. 국제정치도 마찬가지다. 핏줄을 돌아볼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베 총리는 잠시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일이다. 사토 집안의, 심수관 집안의 묵이지지가 뭔 의미일지.

생각할 것은 더 있다. 일제 만행을 몸으로 겪은 한국, 중국 등의 묵이지지는 어떤 내용일지 깊이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아베 정권은 최근 '주권회복의 날' 행사를 갖고 만세 삼창을 했다. 피해당사국의 묵이지지 거울에 그런 행태가 어찌 비쳐질지 자성의 눈으로 돌아봐야 한다. 아베 총리가 그러는 대신에 자기 근본도 돌아보지 못한 채 못난 국수주의 깃발이나 흔들어서야 되겠는가. 그저 '슬픈 아베'일 뿐이다.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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