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스캔들]사슬에 묶인 채 춤추는 사람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2012. 12. 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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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판에서는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평생교육만큼 중요한 것도 드물다. 지식의 주기가 극한으로 짧아진 시대, 교육은 젊은 시기 일정한 기간에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의 삶 모두가 교육의 과정이다.

수유너머, 철학아카데미, 다중지성의정원, 길담서원, 연구모임 아래, 푸른역사 아카데미…. 마포를 중심으로 산재한 대안 학문 공동체들의 공통 화두도 평생공부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평생교육과 대안 인문학 공동체의 평생공부에는 미묘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평생교육이 실용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라면 공동체에서의 공부는 즐거움이자 수행으로서의 공부, 공부 자체가 목적인 공부다.

여기 늦깎이 공부에 빠진 한 70대가 있다. 경복궁 인근에 길담서원이란 이름의 서점 겸 인문예술 카페를 운영하는 박성준 선생. 늘 책으로 가득한 배낭을 메고 다니는 그의 향학열은 뜨겁다. 학생으로, 신학자로, 목사로, 시민운동가로, 교수로 평생을 공부와 더불어 살아온 그가 철학 공부를 처음 시작한 건 4년 전인 69세 때였다. 그 뒤 < 자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 를 다시 읽으며 젊은 시절엔 결코 알 수 없었던 니체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고 했던가. 그가 지난해 7월 마포의 대안연구공동체를 처음 찾은 것도 < 자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 독일어 원서 강독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수강한 과목은 몇 개 더 있다. 스테판 에셀의 < 분노하라 > 프랑스어 원서 강독을 함께했고 목공 수업에도 참여했다.

그런가 하면 수강생을 모으지 못해 폐강 위기에 몰린 < 소피의 세계 > 독일어 원서 강독을 길담서원으로 옮겨 살려내기도 했다. 길담서원에서의 공부거리는 훨씬 더 많다. 영어 고전 강독반인 '콩글리시'와 일본어 인문학 강독반인 '맨땅 일본어'를 이끄는가 하면 청소년 인문학 교실과 어른 인문학 교실 등에서 가르치고 공부한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원전 강독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공부의 일부일 뿐이다. 서원에서의 공부 성과를 책으로 펴내고 각종 세미나와 문화예술 행사를 기획하고 개최하며 여기저기의 특강에 응하느라 시간을 쪼갠다.

그의 사례는 특별한 것이라 치자. 조금 더 연령대를 낮추면 늦깎이 공부에 빠진 사람은 훨씬 더 많아진다. 이를테면 전북 완주의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40대 중반의 최모 목사. 그가 매주 두 차례씩 먼 길을 달려와 파이데이아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융과 니체를 만나고 나서였다.

"개신교 목사로 니체 읽기가 어려운 것은 우선 니체의 혹독한 기독교 비판, 성직자 비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니체가 말하는 방대한 서양철학 전반이었어요."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철학을 공부해야 했는데, 신학교에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제라도 철학을 공부해 니체의 기독교 비판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거나 극복하고 싶었다.

"만약 니체를 창조적으로 수용하거나 극복하지 못한다면?" 하고 묻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직업을 바꿔야지요."

대안 학문 공동체가 다양한 만큼 참여자들의 공부 목적도 다양하다. 역시 가장 많은 부류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이들이리라. 외국어 원서를 읽기 위해, 문화예술을 즐기고 안목을 고양하기 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업무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이들도 많다. 인문학의 실용성을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드는 사례는 스티브 잡스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잡스의 여러 제품들이야말로 그의 인문학 내공에서 유래했다는 식이다. 이들의 목적은 인문학으로 돈을 벌거나 최소한 장식으로라도 써 먹자는 것이다.

이들에 비하면 소수지만 다른 부류도 있다. 애써 실용성과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인문학의 실용성을 멀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것이 화폐로 교환되는 자본주의에서 인문학의 실용성은 더 많은 돈을 벌게 하지만 현실과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막는 탓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하기와 해답 찾기야말로 인문학의 본질 아닌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삶에 거리를 두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대다수 인문 공동체들의 특징이다. 기업보다 더 기업화한 대학의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것에 반비례해 학벌도, 학위도 못 주는 대안 인문학 공동체가 번성하는 이유다. 인문학 공부가 수단에서 목적의 지위를 얻는 것도 실용성에서 벗어나면서부터다.

이들에게 공부는 더 이상 돈이나 더 나은 자리를 얻는 수단이 아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해답의 추구다. 이런 질문과 해답의 반복적인 추구 과정 속에서 삶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앎과 삶의 일치! 이들의 평생공부가 즐거움이자 일종의 수행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런 공부를 함께하는 이들이 혼자 앞서 가겠다며 경쟁을 할 순 없다. 같은 길을 걷는 도반이다. 성별과 세대와 계층을 넘어서는 친구다. 그러므로 이들이 대안 학문 공동체에서 함께하는 공부는 공부에 그치지 않는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내가 지닌 귀한 것을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 이들의 공부는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이기도 하고 함께 밥상을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 공부가 타자와의 깊은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의 공부는 책상머리를 벗어난다. 강의나 세미나와 글쓰기에서 현실의 이슈들을 치열하게 토론하는가 하면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삶, 다른 세상을 모색하고 도모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엄혹하다. 이들에게도 경제적인 압박은 상존하고 돈과 자리를 향한 유혹도 일상이다.

"예술가는 사슬에 묶여 춤추는 사람이다." 길담서원 박성준 선생이 자주 인용하는 니체의 말이다.

현실에서 온갖 구속에 묶여 있으면서도 질문에 대한 풀이의 추구와 자기 변화의 몸짓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이는 온갖 어려움에도 다른 세상을 향한 꿈을 멈추지 않는 여러 대안 인문학 공동체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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