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없고 싱거운' 한국맥주, 업체에서 하는 말이..
[마감 후]맛난 국산 맥주를 마시고 싶다
회사원들에게 일과후의 맥주 한잔은 조그마한 즐거움을 준다.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 직장 상사에 대한 섭섭함, 동료와의 갈등이 한잔 술에 눈녹듯 사라질 때가 적지 않다. 회사 근처 호프집도 좋지만 나는 집에서 마시는 맥주를 선호한다. 무엇보다 술자리가 길어지지 않고 2차 갈 일도 없다. 직장 동료들이 없으니 윗사람이나 다른 동료를 '씹는' 구업(口業)을 쌓지 않아도 된다. '술쟁이' 아내와 함께하면 부부 금실에도 도움을 준다.
맥주는 주로 퇴근길 집 근처 편의점에서 산다. 하이네켄, 삿포로, 아사히, 기린, 산토리 더 프리미엄 몰츠, 호가든…. 판매대에는 전 세계 술꾼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유명 맥주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내가 계산대에 들이미는 맥주는 언제나 판매대 맨 아래쪽 냉장고에 진열된 국산 피처병 1ℓ나 1.5ℓ 제품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산 1ℓ 피처병 맥주는 3500원이면 산다. 반면 기린 이치방이나 아사히캔은 500㎖에 3900원이나 줘야 한다. 같은 양으로 따지면 국산 피처병 맥주보다 2배 이상 비싼 것이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한두 잔 마시다 보면 곧 나의 선택이 현명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맛이 없어서다. 술맛이란 그날 컨디션이나 허기진 정도 등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확실히 국산 맥주는 깊은 맛이 없고 싱겁다.
놀라운 건, 나의 이런 맥주맛 품평을 접한 국내 맥주업체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값이 싸니 맛이 없을 수도 있지 않으냐"고 변명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 맥주가 맛이 없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틀 전 두 명의 맥주업체 임직원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그날은 한국산 맥주가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기사가 한국 언론에 보도된 날이다. 한국 맥주의 '국치일'이었던 셈이다.
기자 = 국산 맥주 싱겁고 깊은 맛이 없다. 한 독일 아주머니는 '워터리(물 같다)'라고 했다.
ㄱ사 임원 = 무슨 소리냐. 단지 기호의 차이다. 김 차장 같은 술꾼은 싱겁다고 말하지만 술을 갓 마시기 시작한 대학생들은 우리 맥주가 청량감이 있어 좋다고 한다. 지금의 맥주맛은 주 소비자층, 즉 대중의 입맛에 맞춘 것이다.
기자 = 유럽이나 일본보다 기술력이 낮거나 나쁜 품질의 원료를 쓰는 거 아니냐.
ㄴ사 부장 = 기술과 원료는 문제가 안된다. 한국 맥주산업의 기원과 관련이 있다. 한국 맥주는 초창기부터 부드럽고 밍밍한 미국 맥주 스타일이 보급됐다.
요약하면 나의 기호가 독특하고, 나의 입맛이 일반적인 한국인과 다르고, 내가 한국에 살면서 독일 스타일의 맥주를 찾아서 국산 맥주가 맛이 없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미각이란 게 사람마다 다 다르니.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들의 해명이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맥주에서 거품은 중요하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입자의 거품은 시각적으로 풍요로움을 주고 맥주 속 탄산이 날아가는 것을 막아준다. 이래야 잔에 따른 뒤에도 맛이 오래간다. 대표적인 제품이 아사히 맥주다. 솜사탕(솔직히 과장됐다)처럼 고운 거품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유리잔에 테두리까지 남긴다. 그 유명한 '엔젤링'이다. 그렇다면 한국 맥주의 거품은 어떤가. 좁쌀(솔직히 좀 더 과장됐다)만큼 크고 빨리 사라진다.
대중적인 입맛에 맞춘다는 해명도 납득이 안된다. 한국 맥주업체들이 지칭하는 대중은 대체 누구일까. 경향신문 박모 전국부장, 삼성그룹 정모 부장, 에코생협 과천점 이모 점장, 서울시청 전모 과장…. 한목소리로 국산 맥주가 싱겁다는 이들은 대중이 아닌 '모주망태'들인가.
한국 맥주업체들이 이코노미스트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바람은 이렇다. 항의서한 작성할 시간에 소비자의 미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발효기술을 어떻게 개선하면 기린 이치방 시보리처럼 깊은 맛을 낼 수 있는지 연구했으면 좋겠다. 어떤 효모와 물을 사용하면 입술에 부드러운 거품이 묻어나는지까지 밝혀낸다면 금상첨화겠다.
< 김준 산업부 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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