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재벌좌파'와 교육 사다리

김민아 논설위원 2012. 10. 15. 21: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키 176㎝의 늘씬한 몸매에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스키니진, 게다가 빨간 운동화라니. "한국을 확 뒤집어 혁명을 일으키고 싶다"는 김성주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은 이미 패션으로 혁명을 하고 있었다. 12일과 15일 기자간담회에서 보여준 언변 또한 파격이었다. "혁명은 여성과 젊은이가 해야 한다. 황금기에 있는 젊은이들이 바라볼 것은 작은 땅덩어리가 아니라 글로벌 영토다" "싸이가 강남스타일이면 정치는 강북스타일, 저는 글로벌스타일이다." 뭐니뭐니해도 백미는 '재벌좌파'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저를 재벌가의 딸로 아는데, 저는 재벌좌파다. 다른 재벌가처럼 정략결혼을 안해 집에서 쫓겨났다."

김 위원장은 고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의 막내딸이다. 집안의 도움 없이 자수성가한 '김성주 신화'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독일 패션브랜드 MCM을 인수한 뒤 30여개국에 매장을 여는 등 MCM을 글로벌 브랜드로 키워냈다. '글로벌 야생마'를 자칭하는 그는 "뉴욕 뒷골목에서 바닥생활을 하며 일을 배웠고 한국 와서도 박스 나르며 일했다. 제가 손이 굉장히 험한데 그 험한 손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재벌 빵집' 논란에 휘말린 공주님들과 김 위원장이 차별화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성공이 100%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서 비롯된 것일까. 언론 보도를 살펴보자. "김 회장의 아버지가 매입한 돈암장은 대지면적만 740평에 달하는 저택이었다. 김 회장은 앰허스트대를 졸업한 뒤 런던정치경제대학원을 거쳐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에서 공부했다"(2010년 6월16일 한국경제), "한국에 돌아온 김 회장은 아버지에게 3억원을 빌려 회사를 설립했다"(2009년 6월3일 서울신문), "외환위기 때 대성그룹으로부터 지급보증을 받아 30억원을 빌렸다"(2009년 7월2일 경향신문 인터뷰). 요약하면 '금수저를 입에 문 채' 태어났고, 미국과 영국의 명문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가졌으며, 사업을 시작할 때 아버지 도움을 받았고, 경영난을 겪자 아버지 회사의 지급보증으로 돈을 빌렸다는 얘기다. 신화의 뿌리에는 가족자본·문화자본이 있었다.

이쯤 되고 보니 김 위원장의 '글로벌 영토론'이 허망해진다. 100m 달리기 시합을 한다 치자. 빵 장사 하는 재벌가 딸들이 70m쯤 앞에서 출발했다면 김 위원장도 30m쯤은 먼저 출발한 셈이다. 그러곤 "IT(정보기술) 시대에는 가상세계 안에 창업 기회와 일자리가 있다는 걸 젊은이들이 알아야 한다. 한국인이 일할 데가 많다. 우리가 찾지 않고 불평하는 것"이라고 훈계한다. "경제민주화를 강제하는 것은 역사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단언도 서슴지 않는다. 한국을 확 뒤집고 싶다더니 '좌파 코스프레'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비빌 언덕조차 없는 '잉여'들에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에게 공정한 출발을 보장할 의지가 없다면 농담으로라도 혁명을 입에 올려선 안된다.

더 큰 문제는 진짜 혁명을 말해야 할 사람들이 점잖은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야말로 젊은 세대에게 계층 상승의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 '교육 사다리'를 놓을 책무가 있다. 문 후보는 지난 8일 혁신교육간담회에서 "우리 교육현실은 교육을 통해서 계층 간 격차가 대물림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고교 서열화를 조장하는 고교정책을 수정하고, 대입전형을 단순화하며, 사회통합전형을 도입해 교육배려대상자가 대학 정원 내에서 일정 비율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고 했다. 안 후보도 지난 4일 호남 방문에서 사회적 약자 우대정책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밝혔다.

이제는 정책 기조를 천명하는 수준을 넘어 파격적인 어퍼머티브 액션(소수자를 위한 적극적 우대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정책을 발표할 때 구체적 시행 시기와 적용 대상도 밝혀야 함은 물론이다. 앞서 다른 이들이 제시한 방안도 검토해 수용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김두관 전 경남지사는 국공립대 학생의 30%를 저소득층에서 우선 선발하고, 외국어고·자사고를 폐지해 일반고로 전환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서울시립대는 2014학년도 입시부터 부유층에 유리한 어학특기자 전형을 폐지하고, 수시모집의 기회균등선발 인원을 3배 가까이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대담한 교육공약을 제시하면 기득권 세력이 거세게 반발할 것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경쟁력 저하를 언급할 테고 나중에는 전가의 보도인 색깔론을 들이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재벌가 출신 보수여당 선대위원장이 좌파를 자임하는 판국에 색깔론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크면 클수록 정책의 폭발력도 커질 것이다. 잘난 아버지를 갖지 못한 청년들도 미래를 꿈꿀 수 있을 때, 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된다. 지금은 정당후보론이니 국민후보론이니 공허한 권력담론을 두고 다툴 때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 삶은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열정을 불어넣을 정치적 상상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 김민아 논설위원 >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