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6·29' 새벽에 '5·18'을 보다

2008. 6. 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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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설

방패와 진압봉으로 완전 무장한 경찰들이 몰려왔다.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던 시민들이 잇따라 맞아 쓰러졌다. 넘어진 젊은 여성에게 경찰들이 달려들어 군홧발로 짓밟고 방패로 찍었다. 인도에 서 있던 환갑이 다 된 아주머니는 곤봉에 얼굴과 어깨를 맞아 기절했다. 사람들을 치료하던 30대 의사까지 경찰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다. 경찰의 집단 폭행을 말리려던 스물네 살 여성 회사원도 되레 전경들에게 맞아 머리가 깨졌다. 비옷이 피로 물든 여성, 정신을 잃은 50대 남성, 입술이 찢긴 고등학생….

6월29일 새벽 서울 한복판 태평로의 모습이다. 착검한 총만 없을 뿐 1980년 '5·18'의 광주 모습 그대로다. 그 5·18의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 군사정권이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항복한 1987년 '6·29'로부터 꼭 21년 만에 국가 권력의 무차별 폭력이 다시 자행됐다. 역사의 시계가 수십 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 것인가.

이런 일이 벌어지기 얼마 전인 26일 어청수 경찰청장은 기자들에게 "80년대식 강경진압을 한번 해볼까 싶기도 하다"고 했다고 한다. 우발적인 게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라는 얘기다. 그 의도도 짐작 못할 바 아니다. 시위와 진압의 충돌을 격화시켜 촛불집회가 고립되도록 하면 쉽게 입을 틀어막을 수 있다는 계산일 것이다.

경찰과 정부는 이런 폭력진압을 정당화하려 해선 안 된다. 어느 쪽의 폭력이 먼저였는지를 따지기도 어렵지만, 어떤 경우에도 경찰이 합법성과 적절성의 테두리를 넘어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게 면책될 순 없다. 군과 마찬가지로 경찰은 고도로 훈련받은 물리력을 지닌 집단이어서 그 남용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5·18 때도 신군부는 권력 찬탈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과잉 진압해 저항과 학살의 비극으로 몰고 갔으면서도 정당한 법집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촛불집회는 경찰과의 충돌로만 끝나선 안 될, 민심의 귀중한 외침이다. 귀 닫은 정권이 이젠 경찰을 앞세워 국민을 치려는 데 격분한 시위대의 심경을 이해 못할 바 아니나, 그렇다고 흥분하기 쉬운 어린 전경들을 적으로 삼을 일은 아니다. 시민들이 많이 다쳤지만, 시위대의 쇠파이프와 각목 등에 맞아 다친 전경도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정작 책임을 물을 사람들은 따로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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