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빅데이터 만능 아니다 현장에서 진짜 정보 캐라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 소장 2016. 9. 10.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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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경영보다 현장경영 인공지능·빅데이터..현실을 수치로 단순화, 날것의 정보 못 보게 해

1993년 초 미국 워싱턴주 클라크 카운티에 사는 앨런 노스럽과 단짝 친구 래리 데이비스는 클럽에서 당구를 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들은 청소부를 성폭행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유죄가 확정됐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오심 재판에 희생당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끈질긴 재심 요구가 받아들여져 범죄 현장에서 채취한 두 범인의 DNA와 이들의 DNA가 명백히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10년 이들은 17년간의 억울한 수감을 끝내고 풀려났다.

이병주생생경영연구소 소장

이해하기 어려운 건 이들이 구속되기까지 과정이었다. 피해자는 용의자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눈을 테이프로 가렸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둘 중 한 명의 얼굴을 흘긋 보았을 뿐이고, 한 명은 짙은 색 머리, 다른 하나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사실만을 기억했다. 경찰은 피해자의 희미한 기억에 의존해서 몽타주를 그렸고, 그림을 배포했다. 몽타주와 닮은 두 사람에 대해 신고가 접수됐고 둘은 체포됐다. 다른 증거는 없었다. 처음에 피해자는 두 사람의 얼굴을 전혀 짚어내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얼굴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만든 몽타주로 범인의 얼굴을 골라낸 것이다.

심리학자 조너선 스쿨러(Jonathan Sch ooler) 교수에 따르면 이런 실수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스쿨러 교수는 심리학 실험에서 이와 너무도 흡사한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30초 길이의 은행 강도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영상에는 강도의 얼굴이 정확히 잡혔지만 금방 지나갔다. 이후 20분 동안 다른 활동을 하게 한 후 테스트를 했다. 비슷한 스타일을 가진 8명의 얼굴이 담긴 슬라이드를 보고 진짜 강도가 누구인지 가려내게 했다. 그랬더니 64%가 강도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이번에는 다른 그룹의 참가자들에게 5분 동안 강도의 얼굴을 자세히 서술해보라고 지시했다. 머리카락의 색깔, 얼굴 형태, 수염의 여부 등을 쓰게 했다. 그러고 나서 이들에게도 똑같이 8명의 슬라이드를 보여주고 진짜 강도를 가려내는 테스트를 했다. 그랬더니 겨우 38%만이 진범을 맞혔다. 얼굴을 말로 설명하게 했더니 무려 30% 가까이 인지 능력이 떨어진 것이다. 이들의 머릿속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언어가 세상을 모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굴을 표현하는 데 쓰는 단어는 몇 개 되지 않는다. 피부색, 머리카락, 눈, 코, 입, 얼굴, 수염 등을 아무리 조합해도 다 다르게 생긴 70억 인구를 모두 다 표현할 수 없다. 현실에는 수천 가지의 빨간색이 있지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몇 개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느낌이 단순화된다. 실험 참가자들이 강도의 얼굴을 말로 묘사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서 섬세한 요소들은 사라지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모습만 남게 된 것이다. 위의 사건 피해자도 말로 그린 몽타주에 용의자 얼굴을 끼워 맞추다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스쿨러 교수는 얼굴에 대한 기억을 말로 표현하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정보에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고 하면서 이를 '언어의 그늘(Verbal Overshadowing)'이라고 불렀다. 철학자들은 언어의 크기만큼 상상력도 넓어진다고 한다. 언어라는 수단으로 인해 우리의 사고는 넓어졌지만, 언어가 복잡미묘한 세상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가로막기도 한다.

기술의 발달로 경영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수많은 경영 기법,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 덕분에 경영자들은 시장과 고객에 대한 폭넓은 인사이트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이런 수단은 현실을 수치화하고 단순화한다. 이처럼 추상화된 정보는 복잡한 현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정리된 수치 속에 현장의 가치 있는 날것의 정보들이 평균화되어 사라진다. 진짜 강도의 얼굴을 까먹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박상훈 기자

2001년 CEO에 취임해 위기의 제록스를 회생시킨 앤 멀케이의 생각도 이랬다. 회사 간부들이 고객들을 소홀히 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진단했다. 멀케이는 고객 대응 프로그램을 여러 개 만들었다. 또 모든 간부가 하루씩 돌아가면서 고객 담당 책임자 직책을 맡게 했다. 그날 제록스 본사에 접수되는 고객의 불만 사항을 모두 처리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멀케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야 시장과 고객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기초를 단단히 다질 수 있고요. 이런 관점은 우리의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록스는 복사기 제조업체에서 문서 솔루션 회사로 거듭났다. 제록스는 빅데이터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회사 중 하나지만 현장에서 고객을 대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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