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급한데..양탄자·납골당 분양권도 받아주나요?"

2011. 12. 9. 19: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뉴스인사이드 - 경찰팀 리포트경기침체의 그늘…전당포에 몰리는 중산층강남 일대만 '폰 뱅크' 30여곳중고명품 팔던 곳이 '대출창구'로 하루 평균 50명 이상 몰려 상담"전세금·자동차는 맡긴 지 오래"장롱 속 추억과 눈물의 이별年 이자 39%…물건 못찾고 포기도

지난 8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A전당포. 50대 중반의 한 남성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색한 듯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는 손목에 차고 있던 롤렉스 시계를 풀었다.

서울 자양동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그는 "(돈을) 급하게 쓸 데가 있어 시계를 담보로 대출을 받으러 왔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딸 결혼식 때 사위에게서 받은 선물이라고 했다. 시계를 유심히 살피던 종업원은 "팔면 200만원, 위탁 판매하면 350만원 정도 받을 수 있다"며 "시계를 담보로 200만원을 월 3부(3%) 이자로 대출할 수 있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10분 동안 머뭇거리던 남성은 한 달 뒤 에 찾으러 오겠다며 대출을 받아 갔다.

몇 분 뒤 또 다른 중년 남성은 골프채를 들고 왔다. 그는 일제 '혼마' 골프채 3개를 맡기고 대출받을지, 아니면 팔아버릴지 고민했다. "600만원을 넘게 주고 산 건데 제대로 쓰지도 않은 채 350만원에 팔기는 너무 아깝다"며 망설이자 종업원은 "급하지 않으면 우리한테 팔아달라고 의뢰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돈이 급한 듯 주저하던 그 남성은 결국 골프채를 맡아달라며 300만원을 챙겨 떠났다.

가난한 서민이나 생활이 어려운 대학생들이 '동산'을 맡기고 푼돈 급전을 마련하던 전당포에 중산층이 몰리고 있다. 경기침체 여파로 장사가 시원찮아 사업자금을 마련하려는 자영업자, 생활비와 자녀 학원비를 마련하러 온 조기 퇴직자 등 찾는 사람들의 사연도 각양각색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전세금·자동차 담보 대출은 물론 카드론, 현금서비스도 끊겨 소중한 추억이 담긴 장롱 속 동산을 꺼내들고 전당포로 향하고 있다. 올 하반기 이후 전당포 방문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현장 관계자들은 전했다.

◆고급 카펫, 납골당 분양권까지 맡겨

서울 압구정동과 청담동 일대에 '폰 뱅크(pawn bank)'나 '폰숍(pawnshop)' 간판을 내건 전당포는 30여곳. 몇 년 전만 해도 중고 명품을 사가는 '명품족'들로 넘쳐나 공급이 달렸지만 최근 들어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중고 명품을 사려는 수요는 줄어든 반면 좀체 전당포를 찾지 않던 중산층까지 명품 담보 대출에 나서면서 공급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청담동의 B전당포에서는 하루 평균 30~40건의 담보 대출 상담이 이뤄진다. 전당포 관계자는 "명품을 취급하는 전당포는 경기에 민감한 업종"이라며 "명품 담보 대출을 받으러 오는 고객이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도 20% 정도 늘었다"고 했다.

이날 압구정동 일대에서 만난 전당포 관계자들은 "최근 경기가 안 좋은 탓에 (전당포에서) 명품을 사는 사람은 없고, 팔거나 담보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며 "올해 명품 회사들이 신제품 가격을 많이 올렸는 데도 중고를 사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건 그만큼 분위기가 안 좋다는 얘기"라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2002년 압구정동에 문을 연 A전당포 관계자는 "이전엔 장사가 잘되는 날에는 70~100여명이 제품을 사러 와 월 2억원 이상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며 "최근엔 명품을 아예 팔거나 담보 대출을 받겠다는 사람만 줄을 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촌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는 K씨는 "사업 자금을 마련하려고 외제 골프채 세트나 명품 시계를 맡기고 돈을 빌려 가는 중소기업 대표나 자영업자들이 부쩍 늘었다"며 "골프채가 많이 들어올 땐 그만큼 중산층 경기가 어렵다는 얘기"라고 했다. 그는 "골프채나 고급 카펫은 찾는 고객이 있어 받지만 납골당 분양권, 권총 등 명품 전당포에서 취급하지 않는 특이한 물품을 들고 왔다가 돈을 꾸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연 이자 39%…"돈 빌릴 데는 이곳뿐"

전당포를 찾는 이들은 이미 금융권 대출 한도를 넘겨 돈을 끌어다 쓴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세금 자동차 등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게 남아있지 않다. 연 30%가 넘는 고이자를 부담하면서까지 전당포를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명품 전당포의 담보 대출 이자율은 월 3~3.25%로 연간 이자로 따지면 36~39%. 대부업법상 최고 수준이다.

이날 압구정동 A전당포에서 다이아몬드 반지와 명품 시계 2점을 맡기고 대출을 받은 정모씨(54·여)는 "대부업체 금리가 높은 걸 누가 모르느냐"며 "남편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져 카드론과 현금 서비스로도 안돼 예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대출 금액과 대출 가능 한도는 물품의 도매가와 보관 상태, 브랜드 인지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해진다. 통상 3~6개월로 정해 놓은 대출 상환 기간도 상황에 따라 연장해주는 곳이 많다. 이 때문에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주인에게 버림받은 저당품도 늘고 있는 추세다.

신촌 전당포의 K씨는 "매장에 전시돼 있는 명품 중에 절반은 담보 대출을 받은 사람이 이자를 갚지 못해 압류된 물건"이라며 "고객들의 100%가 물건을 맡기면서 다시 찾아간다고 약속하지만, 이자가 밀리면서 물건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물건은 매장이나 인터넷을 통해 재판매하지만 요즘에는 중고 명품을 사는 사람이 적어 보관하는 물건이 많이 쌓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100만원 안팎의 소액을 빌리려다 스마트폰 대출사기에 걸려드는 사건이 터지면서 피해자만 2000명이 넘는다"며 "그만큼 사는 게 어렵다는 방증인데 이들 계층이 벼랑끝에 몰리면 절도와 같은 생계형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고 우려했다.

◆'법인' 등록한 전당포 등장

2009년 12월 '오아시스 대부'는 국내 전당포 업계 최초로 법인 등록했다. 전당포 프랜차이즈를 준비 중인 이 기업은 지금도 활발하게 영업 중이다. 모든 거래 내역은 국세청에 신고된다. 저당품 판매 수익에 따른 세금을 내지 않았던 기존 전당포와 다른 점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선 1970~80년대 이미 대형화·고급화된 전당포들이 생겨나 증시에 상장한 폰 뱅크도 있다"며 "우리나라 전당포들도 언제까지 '지하'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법인 등록을 하고 내년 초 전국 각 지역에 프랜차이즈 점포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 금고에는 수입 오토바이, 디지털카메라, 고급 카펫, 미술 작품 등 다양한 물품들로 넘쳐났다. 명품 의류와 패션용품은 보관하고 있는 물품 중 30%를 넘지 않는다고 했다. 금, 은 등 보석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

■ 폰 뱅크(pawn bank)

'저당물, 전당잡히다'란 뜻의 영어 '폰(pawn)'에 은행을 뜻하는 '뱅크(Bank)'가 결합된 말. 상품을 현금화해주는 전당포 기능에 고가품 직거래, 소액 대출 등 은행 기능까지 일부 갖고 있는 신종 금융회사. 미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 가계 부채가 증가하면서 생겨나 현재 전국 점포 수가 1만3000여개에 이르고 나스닥 증시에 상장된 업체도 있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 서울 압구정동과 청담동을 중심으로 30여개 업체가 문을 열었으며, 2009년 '오아시스 대부'가 국내 전당포 최초로 법인 등록했다.

▶ 방사성 위험물질 '고준위 폐기물' 처리 막막한데…

▶ [SNS 톡톡] '강성종 바이오다인 연구소장' 등

▶ Fed 위상 높인 두 거목…금융위기로 평가 엇갈려

▶ 흥부가 박 타는 심정으로…로또에 목맨 사람들

▶ 폴라니 가문, 富와 지식을 사회와 민족 위해서만 헌신

< 성공을 부르는 습관 >ⓒ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온라인신문협회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