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늘어난 간부급들, 할 일 없어 민원 상담·채권 추심

김정훈 기자 2011. 10. 4.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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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행에선 지난해 192명이 임금피크제 대상자였다. 하지만 이들 중 실제 임금피크제를 선택한 사람은 5%도 안 됐다. 나머지 95%는 2년6개월치 급여와 퇴직금(총 3억여원)을 받고 그냥 퇴직하는 길을 선택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대학에 다니는 자녀가 있어 등록금을 계속 보조받으려는 사람들 아니면 굳이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명무실한 금융권 임금피크제

지난 2005년 이후 금융회사들은 앞다퉈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노사 간 윈윈(win-win) 전략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지금 임금피크제는 찬밥 신세이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말 퇴직 대상자에게 임금피크제와 희망퇴직제(급여 36개월치+퇴직 후 자회사 취업 알선)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는데, 직원 대부분은 희망퇴직을 택했다.

임금피크제 도입 4년차인 국민은행에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직원은 현재 전체 정직원 1만6000명 중 0.4%(70명)뿐이다. 시중 은행 인사팀 관계자는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에게 복지비용, 사회보험뿐 아니라 사무실 운영비용까지 들어가기 때문에 인건비 절감 효과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임금피크제는 퇴직을 앞둔 은행원들로부터도 불평의 대상이다. 임금피크제 적용대상이 되면 주로 후선(後線)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점장을 지낸 간부급 직원이라도 임금피크제에 들어가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한다. 지점을 몇 군데 돌며 일상적인 업무 처리를 감사하거나(국민은행), 중소기업에서 거래를 유치하거나(우리은행), 채권 추심 등 대출 사후관리를 하거나(하나은행), 민원 상담을 하는(기업은행) 식이다.

직장 내 권력관계의 역전은 상하 간 불협화음을 낳는다. 임금피크제 대신 퇴직을 택한 지점장 출신 김모(55)씨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한 선배들을 보면 퇴직 후 특별히 할 게 없어 시간을 벌기 위해 회사에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시중은행 지점장은 "(임금피크제) 선배들에게 꼬박꼬박 인사를 하긴 하는데, 선배는 지시를 할 수도 없고 후배는 지시를 받을 수 없으니 서로 불편하다"고 했다. 손민중 삼성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사무직은 나이가 들면서 생산성이 높아지기가 어렵고, 직무 또한 명확하지 않아 임금피크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2005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수출입은행은 아예 '임금피크제 재검토' 안건을 지난달 시작된 노사협의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임금피크제가 실익은 없는데, 정년만 늦추고 임금만 깎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제조업 생산 현장엔 효과 있어

생산직 근로자들은 사무직과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포항제철소 제2제강공장에서 일하는 배인동(53) 파트장은 올해부터 임금피크제 대상자가 됐지만, 직무엔 변화가 없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쇳물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근무 시간이나 하는 일이 임금피크제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다. 배씨는 "시간 날 때마다 신입사원 교육도 하고, 나중에 퇴직을 대비해 후배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작업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지난해부터 56세였던 정년을 2년 더 늘리는 대신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숙련된 조업기술을 가진 직원을 양성하는 데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데, 임금피크제로 고숙련 노하우를 계속 활용할 수 있어 회사로선 이익"이라고 말했다. 배씨와 같은 현장에서 근무하는 홍갑기(45)씨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참 더 일할 수 있는 나이에 땀 흘리는 선배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2003년 처음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100인 이상 사업장 중 12.3%(1232곳)가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다. 앞으로도 1800곳 정도의 회사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용노동부 집계) 하지만 확산 속도가 빠른 건 아니다.

전문가들은 '임금은 낮추고, 기술력은 보존'하는 생산직 임금피크제의 이점을 사무관리직은 잘 살릴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위계와 나이를 따지는 한국의 조직 문화 때문이기도 하고, 회사들 또한 사무직 고령자들에게 적합한 업무를 개발하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지만 연세대 교수(경영학)는 "임금피크제에 들어간 사무관리직은 이전에 자신이 데리고 있던 부하직원에게 업무지시를 받아야 해 조직 내 세대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며 "사무관리직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이 현장 근무를 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임금피크제 정착은 어렵다"고 말했다.

☞ 임금피크제

일정한 연령이 되면 임금을 삭감하는 대신 정년을 보장하거나 정년을 늘리는 제도. 기업 입장에서는 인건비 부담을 덜 수 있고, 한 직종에서 평생을 보낸 고령층의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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