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난민 시대, 일자리 없나요?](1부)불안한 고용, 심화된 빈곤 ②미끄럼틀 부여잡는 사람들

특별취재팀 2010. 8. 16.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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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해고.. 사업 실패·빚 눈덩이.. 허드렛일 전전사회안전망 구멍 숭숭.. 한번 미끄러지면 끝이다

시장 지상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네 삶은 각박하다. 사회를 지배하는 단어는 경쟁, 생존 같은 날선 것들뿐이다. 나눔, 배려, 돌봄 같은 가치를 입에 올리면 패자 취급을 받는다. 지난 6일 밤 서울의 호텔 연회장에서 24살의 아르바이트 여성은 "나를 왜 해고하느냐"며 항의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외침의 메아리는 없다. 되레 대다수는 '악' 소리 한번 못하고 당한다. 비정규직이 소외와 차별 속에서 지낸다면 정규직들은 구조조정 공포로 좌불안석이다. 내 사업을 해보겠다며 명예퇴직한 사람들은 엄혹한 현실세계에 좌절하기 일쑤다. 미끄럼틀 사회에서 헛발질 한번이면 순식간에 밑바닥이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고, 자력으로 버텨야 하지만 버겁다. 고용보험 등 사회안전망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다시 오르기에는 너무 가파르다.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의 직격탄을 맞고 10여년간 헤매던 40대의 386세대,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첫발을 내디딘 30대의 'IMF세대', 2008년 금융위기 충격을 받은 20대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 386세대… 임시직 내몰린 40대들시작은 달랐지만 지금은 모두 '밑바닥'

대졸자로 안정적인 공기업에 다니던 정주원씨(46·가명), 고졸 출신으로 생산직 노동자였던 김갑수씨(46·가명), 대학중퇴자로 자영업 하던 윤영진씨(43·가명)는 1960년대에 태어난 40대 동년배다. 각기 다른 인생길을 걸어왔지만 2010년 이들의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정씨는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던 공기업 직장인이었다. 외환위기 뒤인 99년. 회사는 좀체 만지기 어려운 명예퇴직금 1억5000만원으로 퇴직을 유도했다. "샐러리맨으로 한계가 있고, 개인사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표를 쓰고 목돈을 받아 즉석 정미사업에 손댔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이어 무역업인 목재 수입에 나섰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세 번째 사업으로 우유대리점을 선택했다가 업체가 부도나는 바람에 손을 들었다. 빚은 순식간에 수억원대로 불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전에는 부인까지 암으로 숨졌다. 지난해 봄에는 아파트마저 경매로 넘겼다.

그는 "막상 나와보니 세상은 엄혹했다"고 말했다. 기초수급자가 된 그는 SH공사의 월세 8만8000원짜리 임대빌라로 옮겼다. 지금 서울 강북의 자활센터에서 월 75만원을 받고 청소일을 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에 사는 김씨는 2000년 11월 해고된 뒤 10년 만에 사회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공고를 나와 87년 대기업 계열 공장에서 브라운관을 만들었다. 10여년 일한 뒤 99년 노조를 조직하려다 해고됐다. 퇴직금은 외환위기 뒤 중간정산하는 바람에 나올 땐 거의 빈털터리였다. "한도 80만원짜리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했는데 금방 신용불량자가 됐습니다." 경기 용인 수지에 있던 소형 아파트를 팔아 빚을 갚았다.

"현장 생산직이라 자격증도 없고, 기술직 가운데도 '명장'까지 올랐다가 나와서 화물 운전하는 사람도 있어요. '1등, 최고'라고 해도 회사에서 나오면 소용없고 끝입니다. 세상물정 모른 채 명퇴금 모아 통닭집하다 열에 아홉은 망하데요. 그 다음은 화물차, 택시·버스 운전인데, 그것도 안 되면 막노동일을 합니다. 그러다 가정 깨진 이들도 여럿이죠." 김씨는 퇴사 후 건물철거나 나무심기, 조경, 공장부지 흙 퍼내기 등 막노동일을 했다. 하루 이틀 혹은 1주일, 길어야 1~2개월짜리 단기 일자리였다.

경기 남양주의 윤씨는 지방대 출신이다. 시력회복용 안경 판매일을 했으나 시쳇말로 3000만원을 깨먹고 사업을 접었다. 보안업체, 물품 판매영업 등을 거쳐 한 제약사의 지역총판 소장을 맡았다. "수입이 70만원에서 300만원까지 들쭉날쭉했어요. 주식까지 손댔다가 결국 다 날렸죠. 기반을 잡은 친구들을 어서 따라잡으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습니다." 분식점 개업을 위해 사채에 손을 댔다가 빚이 수억원으로 불었다.

법원에 상의했지만 개인파산이 안 된다고 해서 도망치다시피 집을 나왔다. 후배가 얻어준 단칸 월세방에 틀어박혀 하루에 소주 예닐곱병을 마셔대는 폐인 생활을 했다. 커 가는 자식들을 보며 살아야겠다고 겨우 각오를 다잡았지만 재활이 여의치 않았다.

매사가 수동적이어서, 일식당 일을 나갔다가 3개월 만에 접었다. 최근에야 전국실업극복연대를 통해 마음을 가다듬고 가정방문 청소를 하며 월 79만원씩 번다.

이들이 추락하는 사이 사회안전망은 크게 도움이 안됐다. 정씨는 "그동안 몇차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다가 탈락했다"며 "지난해말 구청을 찾아 담당자에게 애원해서 겨우 수급자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너무 지친 상태여서 잠시 피난처에 온 느낌"이라며 "현재로서는 앞도 좌우도 모두 캄캄하다"고 말했다. 윤씨는 정씨에 비해 사정이 더 나쁘다. 2007년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는데 탈락했다. 최근에는 서민금융인 '햇살론' 소식을 듣고 대출을 신청해 봤지만 신용등급이 낮아 대상이 안된다며 거부당했다.

"고생하면 형편이 더 나아지고 삶의 수준이 올라가는 여건이 돼야죠. 신용불량자로 한 번 떨어지면 다시 제도권으로 올라가기 힘듭니다. 정부 일자리 정책도 단기 계약직 위주예요. 몇년 땀 흘려 일해도 왜 더 나은 기회가 없고 그대로인지 몰라요. 일해도 최저생계비보다 못 버는 건 문제 아닌가요. 가만히 앉아 돈 달라는 것도 아닌데…."

특별취재팀

= 서의동 차장(경제부), 권재현(경제부)·전병역(산업부)·김지환(사회부) 기자

< 특별취재팀 baldkim@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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