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안위, 정전보다 더 큰 문제는 '늑장 보고'
부산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완전 정전'(Black out) 사태와 한 달간 보고 은폐를 계기로 노후 원전의 안전성과 원전 당국의 위기관리 능력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지식경제부 등 관련 당국은 사고의 위험성보다는 보고 체계의 허점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진보 진영이 주도하는 원전 반대 여론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번 사건이 핵물질 안전관리 등을 핵심 의제로 논의하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앞두고 불거졌다는 점도 관계 당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당국은 1년 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원전 안전성 문제가 부각됐을 때 "우리 원전은 비상 전원공급 시스템이 잘 갖춰져 '완전 정전' 사고 가능성은 없다"고 장담했다. 전문가들은 유가 흐름이 불안정하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극히 낮은 상황에서 원자력 활용이 불가피한 만큼 이번 사건을 계기로 원전 안전 시스템을 강화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안전성 문제 없다는데…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소속 전문가 등 18명으로 구성된 현장조사단을 고리 원전에 보내 이번 '블랙아웃'과 사고 은폐 의혹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고 14일 밝혔다. 원안위 관계자는 "이번 블랙아웃 사고는 1978년 상업운전 이후 처음 발생한 중대 사건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시한에 구애받지 않고 정밀 조사할 계획"이라며 "특히 사고 발생 이후 한 달 동안이나 보고가 되지 않은 점 등 조직적 은폐 의혹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고리 원전 운영자인 한수원은 지난달 9일 1호기 전력이 12분간 끊긴 것은 작업자의 단순 실수에서 비롯했다고 해명했다. 안전점검 기간 중 정비원이 '두꺼비집' 역할을 하는 보호계전기(차단기)를 시험하던 중 실수로 당시 유일한 전력공급선인 차단기를 내렸고 이 때문에 외부 전원 공급이 끊겼고, 비상 디젤발전기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상 디젤발전기가 먹통이 됐을 때 즉각 가동돼야 하는 예비 비상발전기가 작동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차단기는 지난해 4월에도 문제를 일으켜 원전 가동이 수일간 중단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고의 원인이 노후 시설이 아닌 작업자 실수이기에 원전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대 이은철 교수(원자핵공학)는 "원전 전원 공급 라인은 크게 3개로 이번 사고에서 1개는 점검 때문에 차단돼 있었고, 1개는 정비원 실수로 끊겼고, 나머지 하나는 작동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환경운동연합의 양이원영 사무국장은 "작업자의 단순실수로 전력공급이 완전히 끊기고, 비상발전기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원전 수명은 보통 30년인데, 무리하게 10년 더 연장시키면서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회 지식경제위원장인 김영환(민주통합당) 의원도 이날 노후원전 조기 폐로 검토를 촉구했다.
◆원안위 위기 관리 능력 논란
완전 정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늑장 보고'다. 당시 원전 관계자들은 블랙아웃 이후 12분 만에 전원을 복구하는 데 성공하자 비상경보(백색경보)를 발령하지 않았고 원안위는 물론 한수원 본사에조차 이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규정에 따르면 전원 공급이 중단되면 즉시 백색 비상경보를 발령하고 발전소에 주재하는 KINS 주재원에게 이를 보고해야 한다. 한수원 관계자는 "사고 당시 발전소장은 보고를 받았지만 전원을 복구하느라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본사와 관계당국에 보고하는 시기를 놓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원전 안전 규제 강화를 위해 출범한 원안위의 위기관리 능력도 도마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사고가 발생한 지난달 9일은 원안위가 고리 1호기 정기검사(2월4일∼3월7일)를 벌이던 기간이었다. 이번 정기검사가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도 육안으로 설비를 확인하고 실제 가동해보는 하드웨어 점검이 아닌 서류 검토와 직원 면접에 의존하는 기존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의심되는 대목이다. 녹색연합 윤기돈 사무처장은 "KINS 직원이 파견돼 있고 정기검사까지 벌였는데 한수원 용역·하청업체 직원들이 쉬쉬해서 몰랐다는 것은 '은폐' 아니면 '무능'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송민섭·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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