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정당한 정책도 ISD앞에 맥없이 '무릎'

2011. 11. 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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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다른 나라는 거의 안거는 소송, 미국은 건다

멕시코, 1억9180만달러 배상

자당산업 보호 위한 소비세에미국 액상과당 기업들이 제소 아르헨, 1억6500만달러 배상30년간 수도 운영권 딴 미 기업부실관리로 권리 박탈되자 제소 캐나다, 담뱃갑 규제안 철회'순한맛' 표기금지 도입 추진에 필립모리스, 항의서 보내 저지

정부는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우리나라가 1967년부터 맺은 81개의 투자협정에서 도입한 제도로서 한국인의 국외 투자 보호를 위한 장치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국을 제소하거나, 외국 투자자에게 제소당한 적은 한번도 없다. 미국이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제도를 주로 이용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지난해 말까지 알려진 국제 중재사건 390건 가운데 미국 투자자가 신청한 사건이 108건, 미국 정부가 제소당한 것이 15건으로 전체의 31.5%(123건)다. 특히 1994년 미국·캐나다·멕시코가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이 발효되면서 중재사건이 급증했고, 그 실체가 드러났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2004년 1월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나프타의 깨진 약속'이라는 기고문에서 "새로운 종류의 '권리장전'이 북미 전체에 걸쳐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환경, 보건, 안전을 위한 각종 규제들이 공격을 받아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다. 현재까지 배상액을 합치면 130억달러가 넘는다"고 평가했다.

멕시코는 조세정책이 문제가 됐다. 멕시코 정부는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인 자당이 아니라 다른 감미료를 사용한 탄산음료에 소비세 20%를 부과하기로 했다. 수입산 액상과당으로 인해 설 자리를 잃은 자국의 자당 산업을 보호하려는 조처였다. 그러나 액상과당을 생산하는 미국 기업 3곳이 자유무역협정 위반이라고 멕시코 정부를 중재절차에 회부했고 중재심판부는 1억9180만달러를 배상하라고 판정했다.

2006년 7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미국-아르헨티나 투자협정 탓에 미국 기업 아주리에 1억6500만달러를 물어줘야 했다. 아주리는 미국 회사 엔론에서 분사한 기업인데, 199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의 수도를 30년간 운영할 권리를 따냈다. 그때부터 수돗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고, 이듬해에는 독성 박테리아까지 쏟아졌다. 지방정부가 2001년 운영권 협약을 종결하자 아주리는 중재절차를 신청해 배상금을 받아냈다.

이러한 중재심판의 특징은 행정소송처럼 국가정책의 정당성이나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의 어떤 조처로 인해 투자자의 자산 가치가 감소했고, 이것이 협정 위반이라면 배상의 대상이 된다고 판단한다. 미국 기업인 메탈클래드가 쓰레기 폐기장 설치 허가를 취소한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낸 중재신청에서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가 2000년에 내놓은 결정문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외국인 투자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액의 배상금만이 아니다. 중재심판으로 가지 않고도 국가정책을 무력화할 수 있다. 2001년 12월 캐나다 정부가 담뱃갑에 '순한 맛'이라고 표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를 도입하려고 하자 미국 담배회사인 필립 모리스가 자유무역협정 위반이라며 항의서를 보냈다. 캐나다 정부는 투자자-국가 소송제에 따른 배상금 부담을 계산해본 뒤 규제안을 철회하기로 했다. 지난 7월 우리 정부도 4대강 공사로 공급 과잉이 된 굴삭기 신규 등록을 제한하는 '건설기계 수급조절' 정책을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포기한 바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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