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초점] 만일 삼성이 한국을 떠난다면

이지훈 경제부장 jhl@chosun.com 2011. 4.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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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삼성이 한국을 떠난다면….'

세금 4100억원을 추징당한 '선박왕' 권혁씨의 너무도 당당한 인터뷰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그는 160여척의 배를 빌려줘 한국의 자동차 등을 해외로 실어나르게 하는 사업을 하면서도 배나 회사의 적(籍)을 한국이 아니라 10여개의 조세피난처와 홍콩에 뒀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권혁씨의 경우는 기업이 마음대로 국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글로벌시대의 현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세계 일류 기업인 삼성도 얼마든지 권혁씨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 본사 이전 설(說)이 여러 차례 대두된 적이 있다. 2005년에 외국인 투자자가 삼성전자 본사의 해외 이전을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삼성 비자금 특검이 있었던 2008년에도 해외 이전설이 나왔다. 핀란드의 대표기업 노키아도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의 새 대표이사가 취임한 뒤 본사의 미국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최근에 있었다.

삼성이 본사를 해외로 옮긴다면 그 파장은 선박왕 권혁씨에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2009년 삼성그룹 계열사 71개의 총매출은 220조원에 달해 우리 GDP의 5분의 1을 차지한다.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전체의 23%이고,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4%에 이른다. 삼성 같은 한 나라의 대표기업이 국적을 통째로 옮기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드물지만,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유념해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탈세(脫稅)는 어떤 경우에도 막아야 한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많은 기업을 한국에 유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기업들은 죄다 해외로 빠져나가고, 한국은 빈 껍데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대만(20%), 싱가포르(17%), 홍콩(16.5%)에 비해 높다.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낮지만 아시아의 주요 경쟁국들보다 높다는 게 문제다. 초(超)국적 시대의 국가 생존법은 세원(稅源)은 넓히되 세율(稅率)은 낮추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는 세금보다도 무서운 것들이 많다. 맥킨지가 한국에서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한국의 기업 규제 정책, 법치주의 확립과 노사관계가 최하 수준으로 평가됐다. 정부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민간 기업에 가격을 낮추라고 압력을 넣는 것은 기업을 해외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정부 초기에 '이명박 전봇대 뽑기'로 상징되는 규제 완화 드라이브를 들고 나왔던 모습은 지금 찾아볼 수 없다.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번창하는 것은 기업 활동이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對)기업 서비스 마인드가 그것을 뒷받침함은 물론이다.

권혁씨와 같은 돌출 사례로 인해 나머지 기업들에까지 반(反)기업 정서가 확산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정당하게 돈 벌어 세금 낸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 기업이 내는 세금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 세금이 잘 쓰여지지도 않는다면 어느 기업주도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이 대기업 하기에만 좋은 환경이 돼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 반대가 돼야할지 모른다. 한국이 진짜 강해지려면 일본이나 독일처럼 강소(强小)기업이 많아야 한다. 중소기업·벤처기업도 대기업으로 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업의 저변이 넓어져야 어느 날 삼성 같은 기업이 한국을 떠난다고 해도 패닉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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