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CEO] 인도네시아서 전기밥솥 1위 성공신화를 쓰다

입력 2010. 5. 28. 14:51 수정 2010. 5. 28. 14: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보장된 한국 시장을 버리고 해외로 나간 사람이 있다. 그가 가지고 간 제품은 그곳에 없는 제품이었다. 그가 가지고 간 제품명은 해당 국가의 말이 돼 버렸다. 그는 그곳에서 시장을 만들었고 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었다. 나이키나 월마트처럼 자사 소유의 공장도 없다. 한국 본사에서 연구ㆍ개발(R&D)하고 중국 공장에서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한 뒤 인도네시아에 수출하는 글로벌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가 바로 용마의 창업자 마용도 회장이다. 그가 생면부지의 땅에서 어떻게 시장점유율 1위의 성공신화를 만들었을까? 마 회장의 '인도네시아 시장개척기'를 들어봤다.

한국에서 7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 서남쪽으로 가면 5300여 ㎞ 떨어진 곳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가 나온다. 이곳에서 마용도 용마 회장은 전기밥솥 하나로 '밥솥 왕국'을 만들고 있다.

"매직콤(Magic com) 주세요."

인도네시아의 카르푸 매장에서 밥솥을 사는 사람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인도네시아에는 전기밥솥이라는 단어가 없다. 이 때문에 용마가 생산하는 전기밥솥의 브랜드인 매직콤이 자연스럽게 전기밥솥의 뜻을 갖게 됐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일본제 코끼리표 밥솥이나 샤프 밥솥을 사면서도 "매직콤 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용마가 생산하는 매직콤이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전기밥솥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마 회장은 "생각을 바꾼 발상의 전환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은 우리나라 밖에 무한한 시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생각으로 끝난다"며 "창조적 아이디어는 실행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도 생각을 바꾸면 쉽게 해결된다고 믿는다. 이른바 생각을 바꾸는 '발상의 전환 리더십'에 대한 신봉자다.

마 회장은 또한 직원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그는 "사장은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사람"이라며 리더십이란 "직원이 사장 눈치보지 않고 맘껏 일하도록 배려한 데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사장이 사무실에 있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도록 오전만 출근해 결제하고 그 이후는 집에서 일한다.

◆ 세상은 넓고 시장은 크다

= 외환위기 직전인 1995년 한국 전기밥솥 시장은 포화상태였다. 출혈경쟁으로 많은 기업이 도산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이대로 출혈경쟁을 하면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마 회장은 "당시 직원 300명을 먹여살릴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했다"며 "위기의식에 몸서리가 쳐졌다"고 말했다. 1979년 10월 창업 이래 대우전자와 필립스에 전기밥솥과 주방용품을 만들어 납품하고 일부는 직판을 했기 때문에 헐값경쟁은 경영에 치명적이었다.

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친구들과 골프여행을 떠났다. 이틀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며 재래시장을 방문했다. 밥솥회사 사장인 그의 눈에 골동품 가게에 있는 전기밥솥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실 그것은 밥솥이 아니라 밥만 할 수 있는 '열판'이었다. 마 회장은 반사적으로 "인도네시아에도 전기밥솥이 있나요"라고 물어봤다.

그런데 가게 주인으로부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전기밥솥이 무엇인가요."

인도네시아에는 그때까지 전기밥솥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전기밥솥이 없단 말인가?" 호기심에 전자제품 판매점을 방문했다. 가게 주인의 말대로 전기밥솥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서울로 돌아온 마 회장은 시장조사를 해봤다.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부산에서 유독 용마의 전기밥솥이 잘나가고 있었다. 탐문 결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보따리장사들이 용마가 생산한 전자밥솥을 대량으로 구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 회장은 국내 시장을 접고 당시 인구 2억2000만명의 거대 시장에 도전장을 내기로 결심했다.

◆ 내 브랜드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 "결론은 해외시장이다." 마 회장은 인도네시아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대우전자와 필립스의 OEM업체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 브랜드를 갖자. 시장이 없는 곳에서 신세계를 창조해보자." 일부는 알래스카에서 냉장고를 파는 격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마 회장의 결심은 단호했다.

"인도네시아는 정말 매력적인 시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기준으로 인구가 세계 4위 2억2000만명이었으니까요. 그 많은 사람이 일반 솥에 밥을 지어먹고 있었어요. 제가 전기밥솥을 소개하자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입을 쩍 벌릴 정도로 신기해했습니다."

마 회장은 "시장이 없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 전기로 밥을 하는 마술 같은 전기밥솥이라는 의미에서 '매직콤'이라고 이름을 정했다.

취사와 보온 두 가지 기능을 갖춘 전기밥솥에 '매직콤'이란 브랜드를 달아 제품을 출시했다. 마 회장은 "당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전기밥솥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밥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고 말했다.

마 회장은 신문광고를 통해 '전기밥솥'의 효능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선풍적인 인기몰이가 시작됐다.

◆ 인도네시아인의 마음을 울리다

= 대기업 하도급업체로 마 회장이 일하면서 배운 것은 "내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프리미엄 브랜드만이 시장에서 살아남는다고 믿었다. 마 회장은 인도네시아의 초특급 연예인을 광고모델로 기용했다. 샌드라 대위, 마우디 등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들만 광고모델로 내세웠다. 그것도 전국적인 방송만을 상대했다. 특히 CM송으로 승부를 걸었다. "용마는 삶의 매직이야(Yongma is magic in life)." CM송은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

하루 생산 능력 2000개에 불과했던 경기 군포의 공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밀려드는 주문을 맞추기 위해 24시간 공장을 가동해야 했다.

현지 유통업체들이 경쟁사보다 먼저 제품을 확보하기 위해 공장 앞에 진을 치는 일까지 생겼다. 인도네시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군포공장 앞에 투숙하며 완제품이 만들어지는 대로 실어갈 정도였다.

1997년부터 매월 공장을 증설해 하루 생산시설 1만5000개까지 규모를 7배나 키웠다.

마 회장은 다양한 사회공헌을 통해 현지인에게 다가섰다. 지난해 10월 인도네시아 파당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자 쌀 1만포대와 밥솥 1000개를 보냈다. 2003년과 2008년에는 인도네시아대학(UI)과 족자카르타에 있는 다자마자대학 등 현지 명문대학 두 곳에 도서관과 음악당, 카페테리아를 갖춘 현대식 건물 '한국관'도 세워줬다. 이곳에서 수많은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한국어 공부를 하며 한국을 배우고 있다.

◆ 경쟁사들이 생겨나다

= 매직콤이 불티나게 팔리자 1998년쯤 복제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프리미엄 브랜드'전략을 고수하던 용마에 최대 도전은 헐값 제품이었다. 특히 중국의 저가 OEM제품들이 쏟아졌다. 일본제 고가 제품도 시장을 교란시켰다.

매출이 순식간에 20%가량 급감했다. 문제는 현지 기업들이 매직콤이라는 브랜드를 달아 사용하면서 심각해졌다. '○○○매직콤', '△△△매직콤'이란 브랜드로 고객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결국 현지 업체 4개사와 소송을 해서 이겼다.

용마가 승소함에 따라 현지 업체들은 '매직콤' 브랜드 대신 '밥솥(rice cooker)'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매출이 다시 늘기 시작했다.

◆ 오픈 소싱으로 경쟁력 발휘

= "2005년 들어 한국에서 공장하기가 정말 힘들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인건비가 급등했습니다.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공장을 해외로 이전할 것이냐, 아니면 아웃소싱할 것이냐를 놓고 밤잠을 설쳤습니다." 마 회장은 "제품 경쟁력은 물론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눈물을 머금고 중국 광저우로 생산기지를 옮겼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 투자하는 방식 대신 OEM방식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수년 동안 대기업의 OEM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OEM의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키처럼 서울 본사를 연구개발(R&D)센터로 전환했다. 30명의 핵심 인력이 디자인, 제품개발, 품질관리, 마케팅 전략을 수립한다. 이렇게 해서 마 회장은 한국~중국~인도네시아를 연결하는 3각 채널을 만들었다. 제품개발과 마케팅ㆍ디자인은 서울에서, 제품 생산은 중국에서, 판매는 인도네시아에서 하는 글로벌 오픈소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 회장은 인도네시아 시장 개척은 현지인에게 맡겼다. 그는 4~5차례 방문해 사회사업과 주요 현안만 결제한다. 모든 지휘는 서울 본사에서 이뤄진다. 오픈소싱 결과 용마의 경쟁력은 또다시 높아졌다.

◆ 인도네시아 유통채널 1개로 통일

= "처음부터 외상거래는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달러로 거래했습니다."

마 회장은 원화값 등락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처음부터 달러를 기본 통화로 정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거래가 선결제, 후납품이라는 사실이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물건을 판매할 당시 '공급자 파워'가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OEM업체와의 거래도 달러가 기본이고 현금으로 거래한다. 그만큼 OEM업체와 높은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용마제품의 인도네시아 수입상은 당초 1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마 회장은 2005년 단 1곳으로 통일했다.

◆ 프리미엄 브랜드 구축…사업분야 확대

= 마 회장은 한국기업이 만든 프리미엄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매직콤의 현지 시장점유율은 25%에 달한다. 50만루피아(약 7만원) 이상의 고가 제품의 시장점유율은 90%가 넘는다. 이 때문에 용마에서 생산한 고가 전자식밥솥은 인도네시아인들의 '혼수품 1순위'로 손꼽힌다. 전자밥솥으로 구축한 프리미엄 이미지를 앞세워 마 회장은 현재 선풍기와 냉ㆍ온수기, 정수기 분야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3월에는 매직콤 판매사인 '매직홈시스'를 설립했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AS에 대한 서비스도 강화했다. '서비스회사'를 별도 법인으로 설립해 100여 명 전담요원이 40군데에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 올해는 본사 사옥도 신축할 예정이다. 지난해 매출은 3000만달러(약 360억원), 순이익은 70억원이다.

1년에 판매하는 밥솥만 160만개에 달한다. 마 회장은 3년 뒤 밥솥 매출이 300만개로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포화상태인 한국시장에서 판매되는 밥솥은 160만~170만개. 이를 2억5000만명의 인도네시아 시장에 적용하면 연간 850만개의 밥솥이 팔리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가운데 30%(255만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마 회장은 "시장이 성숙해질수록 프리미엄 브랜드가 각광을 받게 돼 있다"며 "인도네시아 중산층을 공략한 뒤 동남아시아의 인근지역으로 시장을 확대해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 시장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

= "전기밥솥 시장의 탄생에서 성숙에 이르기까지 한국시장에서의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요." 마 회장은 "한국시장에서 전기밥솥이 걸었던 길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인도네시아 시장 개척과 공략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며 "해외진출을 고민하는 기업들은 주저하지 말고 해외로 나와라"고 조언했다. 그는 "특히 한국시장에서 수십 년 전에 발생했던 일들이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가에서 현재 발생하고 있다"며 "한국기업들이 가진 선진 노하우라면 인도네시아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소비자 입맛에 어떤 변화가 발생할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시장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분석이다.

마 회장은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잠재력이 큰 시장이다"면서 "15년간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더 큰 도전정신과 열정을 강조했다. 인도네시아시장의 무한 잠재력을 향해 그는 오늘도 인도네시아 지도를 펼쳐 놓고 시장공략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 마용도 회장은…

그는 대학 졸업 후 마마전자에 입사해 1979년 용마전기를 창업한 이래 '전기밥솥' 외길을 걷고 있다. △1971년 조선대학교 졸업 △1974년 마마 상무 △1979년 용마전기 설립, 1979년~현재 용마전기 대표이사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2000년 서울대 경영대과정 수료 △1979년 은탑산업훈장 수상 △2000년 무역의 날 3천만불 수출의 탑 수상

[최은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A도 모바일로 공부한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