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화폐개혁

2010. 3. 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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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열려라 경제]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이번에 실패로 돌아간 북의 화폐개혁은 남쪽의 1962년 화폐개혁과 비슷한 면이 있다. 5·16 군사정변 후 설치된 최고 권력기구이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6월10일 0시를 기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구권 10환을 신권 1원으로 호칭변경하면서 1년 미만짜리 단기예금의 일부에 대해 지급을 정지하는 봉쇄조치를 했다. 새 화폐의 주조는 영국의 드라뤼 회사에 몰래 맡겼고, 부산항에 도착한 신권은 폭발물이라고 속여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화폐개혁은 원래 1961년 7월 최고회의 재경위원이던 유원식이 박정희에게 제안하여 시작됐는데, 모든 과정이 철저히 비밀로 진행돼서 심지어 한국은행 총재 민병도, 당시 최고회의 재경분과위원장 김동하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민병도는 1961년 6월9일 저녁 7시 반 최고회의에 참석해서 유원식의 발표를 듣고 처음으로 화폐개혁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마치 쇠망치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무척 기분이 나빴다. 나쁜 정도가 아니었다. 화가 났다."

더 화를 낸 쪽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건국 후 화폐개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화폐개혁 자체를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원조공여국인 미국은 한국이 사전 통보, 협의 없이 화폐개혁을 추진한 데 대해서 크게 화를 냈다. 특히 일부 예금을 봉쇄한 데 대해 강력 항의하면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박정희가 굴복해서 봉쇄계정을 해제함으로써 원래 퇴장자금을 끌어내 산업개발에 이용하겠다는 화폐개혁의 주요 목표는 희미해졌고, 1962년 화폐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화폐개혁의 입안자 유원식은 최고회의 재경위원직을 사임하고 권력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훗날 그는 회고록에서 박정희가 미국의 압력, 회유에 굴복해서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봉쇄계정을 해제해서 화폐개혁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대미의존적 종속경제로 전환했다고 비판했다.

유원식은 일제시대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주(旦洲) 유림(柳林·1898~1961)의 외아들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유림은 외아들이 일본군 장교가 됐다는 이유로 아예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위가 이승만 정권의 고위 경찰이라는 이유로 사위는 물론, 외동딸과도 인연을 끊고 지냈다. "그대 있어 대한민국이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대한민국이 비었구나."(君在大韓重 君去大韓空) 1961년 4월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거행된 단주 유림선생 사회장 당시, 장례위원장인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의 추도사 한 구절이다.

최고회의의 진시황이라 불리던 유원식도 화폐개혁 실패로 권력을 잃었고, 북한 노동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도 화폐개혁 실패 후 사임하고, 최근 총살설까지 나도니 화폐개혁은 참으로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화폐개혁은 권력자의 무덤인가.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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