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는 옛날 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시타마치[下町]에 둘러 싸여 있다. 일본 문화를 체험하려고 나는 일부러 몇 년간을 이 시타마치에서 생활했었다. 시타마치의 옛날 집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일부러 옛날 문화가 좋아서 집을 고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현대식 사우나에 밀려 사라져 가는 서울의 동네 목욕탕과는 달리, 도쿄 시타마치에는 아직 몇백년이 넘은 센토[銭湯,목욕탕]가 적지 않다. 나는 요즘 마루가 깔린 서양식 집에서 살고 있는데, 가끔 "건초 냄새가 풍기는
다다미 방이 그립다"는 일본인들 마음이 이해되곤 한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추억이나 역사를 사랑하고, 그것을 이용한 상업적인 수완도 뛰어나다.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갈 때 갖고 나가는 비상약 정로환에서도 추억을 귀중히 여기는 일본인들의 독특한 상술을 만날 수 있다. 배탈, 설사, 식중독의 즉효약인 이 약은 해외여행을 떠날 때 꼭 갖고 가야할 약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중국에서도 '찡루완'이라 하여 필수약으로 알려져 있다.
정로환의 역사
이 약의 역사는 1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5년에 벌어졌던
러일전쟁 때, 물이 안 맞아 일본 병사들은 전쟁을 하던 중에도 복통을 참아야 했다. 이때 강력한 살균력을 지닌 크레오소토를 주성분으로 하는 정로환은 병사들의 배를 치료해주는 신(神)의 약이었다. 정로환은 말 그대로, 러시아[露, 로시아]를 정복하는[征] 알약[丸]이었다.
|
 |
|
|
| 1940년대 정로환이 < 전몰기념환 > 이었던 적이 있다. |
|
메이지 시대, 일본 육군은 장병의 건강 관리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의학이나 영양학이 발전하디 못하여 평균수명이 쉰살에도 못 미쳤던 19세기의 말기,
청일 전쟁의 전몰자 1만 3천 3백 9명 중에 전투에 의해 죽은 이는 불과 1415명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1만천여명이 비타민 B1의 부족으로 죽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당시에는 비타민이 무엇인지 몰라 서구인에는 볼 수 없는 일본 특유의 풍토병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또 중국 전선에서는 비위생적인 물 때문에 전염병도 많아서, 육군은 이 대책에도 동시에 임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1902년 크레오소트제가
티푸스균에 대해서 효과가 있는 것이 판명된다. 이 약으로 인해 설사나 복통을 호소하는 병사는 격감했다고 한다.
당시 이 환약의 정식명칭은 「크레오소트환」이며, 정로환은 어디까지나 속칭이었다.「정로」라고 하는 말은 러시아를 박살 낸다고 하는 의미로, 그 당시의 유행어였다. 나아가 , 그 지사작용은 귀환한 군인들의 체험담으로서 다소의 과장도 섞어 전해져 또 전승 무드 속에서 「러시아를 넘어뜨린 만능약」은 많은 메이커로부터 서로 경쟁하여, 제조 판매되어 일본의 독자적인 국민약으로서 보급되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후, 국제 신의상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뜻의 '정로환(征露丸)'이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행정 지도가 있어 정로환(正露丸)으로 고쳐졌다. 정벌한다는 정(征)자가 현재 일본에서 대부분 바르다는 정(正)자로 바뀌었는데, 나라현의 일본의약품제조 주식회사에서는 원래의 정로환(征露丸)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본래 상자에 그려져 있는 인물은 초대 육군 군의총감인
마츠모토 쥰[松本順]이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나팔이 그려져 있다.
|
 |
|
|
| A는 1949년 정(正)자로 바뀌어 요즘도 판매되고 있는 정로환, B는 당시의 정로환, 육군약품판매주식회사라고 써 있다. C는 현재 나라현에서 생산되는 정로환 |
|
야스쿠니 신사 안에 정로환
작년 2005년 일본 곳곳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전승 100주년을 기리는 기념식과 전시회를 열고 있다. 국내에는 러일전쟁에 관한 연구가 그리 활발하지 않은데, 최문형 교수의 『국제관계로 본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병합』(지식산업사,2004)은
명성황후 사건이나
독도 문제가 모두 러일전쟁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는 귀한 연구서적이다. 이 책은 일본 후지와라 서점과 동시에 출판되어 일본에서는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일본인들이 백인을 이겼다고 자부심을 갖게 한 러일전쟁 100주년 기념식에서 나카소네 전 총리는 "러일전쟁은 아시아 민족에게 우리도 백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며 연설했다. 이러한 자리에 전시되는 진열품 중에 하나가 정로환이다. 발틱함대를 물리친 정로환을 보면서 나이든 노 병사는 일본인으로 태어난 긍지를 끄덕일지 모르나, 나는 복잡한 심경에 묵상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왜 나는 이 작은 약병 앞에서 멈칫 하는 걸까.
첫째, 역사와 추억을 돈으로 만드는 저들의 상술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100년 앞을 보고 물건을 만든다고 한다. 100년이 된 이 약은 아직도 한국이나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여행과 캠핑의 필수품이다. 도쿄의 북부 지역을 100년 동안 달리고 있는 전차 토덴[都電]도 마찬가지다. 한국에는 전차가 이미 30여년전에 모두 없어졌으나, 일본 곳곳의 전차는 이방인들의 호기심과 추억을 꼬드긴다.
둘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성을 상술로 삼은 일본인의 집착이다. 그들은 100년전 인간의 똥, 신진대사 문제를 이렇게 확실하게 해결해주는 약을 먼저 개발하여 내놓아서 아시아의 설사약 시장을 석권했던 것이다.
셋째, 상술과 함께 발전해온 일본 제국주의를 묵상하게 되는 것이다.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해서 정로환이 야스쿠니 신사에 기념품으로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그 의미가 지금도 계승되고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는 것이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라는 언표를 대할 때마다 다가오는, 곧 역사적인 거부감과 동시에 뛰어날 상술에서 느껴지는 어지럼증이 저 작은 약병을 볼 때마다 스멀거리는 것이다.
< 저작권자(c)아시아경제(www.akn.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