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몰락이 말하는 진실 "대마불사·속도전 그만"

박은하 기자 2016. 4. 2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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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빅3 호황기 누릴 때 중소업체는 몰락… ‘사내하청화’ 가속되면서 노동시장 양극화 심화
4월 22일 경남 거제시 옥포동에 있는 대우조선해양 조선소에서 선박 건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한때 5만 명 가까이 근무했던 대우조선해양은 4만5000여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인력을 올해 안에 3만 명 수준으로까지 감축할 예정이다. / 박은하 기자

“어려운 수준이 아닙니다. 거제는 내년에 유령도시가 돼요.”

4월 21일 경남 거제시 고현동 번화가에서 만두 트럭을 운영하는 강모씨(51)의 말에는 위기감보다는 절망감이 더 짙게 묻어났다. 이날 오후 8시30분 거리는 한산했다. 삼성중공업 야드 인근에 있어 거제시 최고의 번화가로 꼽히는 거리였지만 치킨집, 카페, 음식점 등에는 테이블의 20%도 채 차지 않았다. 손님이 없어 오후 9시에 접는 포장마차도 있었다. 이곳에서 8년째 만두 장사를 해온 강씨가 말을 이었다. “지금 다니는 사람들이 예전의 10분의 1 수준입니다. 예전에는 잔업이 있어서 오후 5시, 7시, 9시, 11시 나눠서 퇴근하느라 거리가 늘 사람들로 북적였어요. 거가대교 개통할 때가 제일이었지요. 지금은 일도 없고, 언제 잘릴지 몰라 다들 숨죽이느라 오후 5시에 다 퇴근해서 조용하다는 거 아닙니까.”

거제는 한때 ‘불황을 모르는 도시’였다. 국내 빅3 조선업체에 해당하는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조선소가 국제적으로도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어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에도 ‘돈 걱정’은 없었다. 거제도와 부산 가덕도를 잇는 거가대교가 개통하던 2010년 국내 선박해양구조물 수출은 491억1200만 달러, 국내 전체 수출의 10.5%를 차지했다. 반도체에 이어 2위였다. 국내 조선업계가 선박뿐 아니라 해양플랜트(해상 석유탐사시추시설) 산업에 뛰어들어 실적을 내던 무렵이었다. 강씨가 제일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는 때다.

‘불황을 모르는 도시’는 ‘유령도시’가 될 걱정을 하고 있다. 2014년 조선업의 수출실적은 398억8600만 달러, 국내 수출액 중 비중은 7.0%로 줄었다. 대우조선해양은 최근 3년간 총 5조원, 삼성중공업은 지난해 1조5000억원 적자를 냈다. 대우조선해양은 수주한 해양플랜트 18기 중 9기를, 삼성중공업은 해양플랜트 24기 중 5기를 올해 상반기 선주사에 인도할 예정이다. 신규 수주물량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1분기 선박 수주는 조선업 전체를 통틀어 9척에 그쳤다. 신규 수주가 없다는 말은 적어도 향후 2~3년간 일감이 끊긴다는 의미다. 기존에 수주해 놓은 일감이 있던 상황에서도 지난해 조선업계에는 1만5000명이 일터를 떠났다. 국내 중대형 9개 조선사의 조선 및 해양 관련 인력은 2014년 20만4635명에 달했으나 지난해 19만500여명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추산됐다. 일감이 사라진 이후에는 몇만 명 단위로 구조조정이 진행될 예정이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노동조합은 지난 6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추가 수주가 없는 상황에서 현재 일들이 마무리되는 올 6월부터 대규모 고용대란이 우려된다며 “거제시를 고용재난특별지역으로 선포할 것”을 촉구했다. 지역경제 붕괴는 피할 수 없게 됐다. 수출실적도 내리막길을 걸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경제 전체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최근 30년 동안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대들보이자 불과 5년 전만 해도 ‘최고의 시절’을 누렸던 조선업은 이제 ‘제2의 IMF 사태’ 뇌관으로 추락했다. 글로벌 경기침체의 영향이다. 또한 모험적 경영자 소수의 잘못된 판단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대우조선해양의 부실화 과정만 보더라도 ‘미뤄둔 구조개혁의 산물’이자 ‘한국형 성장모델’이 한계에 달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유령도시’의 뇌관은 ‘가장 좋았던 시절’에 이미 타들어가고 있었다. 2008~2009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불거진 글로벌 경기침체로 선박 수요가 줄어들면서 전 세계 조선업이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을 때 한국의 조선업계는 정반대로 역대 최고의 실적을 쌓았다. 2008년 431억5700만 달러였던 조선해양 수출실적은 4년 연속 치솟아 2011년에는 565억88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선박 실적 부진을 해양플랜트 분야에서 메우고 남은 덕이었다. 셰일가스 개발로 저유가 국면이 지속되면서 석유 메이저 업체들이 앞다퉈 심해 유전 개발에 나서 석유탐사 및 시추 구조물인 ‘해양플랜트’ 수요가 급증했다. 국내 업체들도 앞다퉈 뛰어들었다. STX 팬오션 등 인수·합병으로 급속히 성장한 신규 업체도 경쟁에 가세했다. ‘신성장동력’을 앞장서 선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정부는 2013년 해양플랜트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지정하고 5년간 5조9000억원의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 및 해양 수출실적은 2012년 397억5300 달러로 급락했다. 2013년에도 371억8600 달러로 줄었다. 정부의 정책은 완전히 뒷북이었다.

김용환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기존의 조선업과 해양플랜트 산업은 성격에서 차이가 많은 산업임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대책 없이 기업이 성급하게 뛰어든 것이 현재 조선업 위기의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서울대 공대 교수 26명이 공동집필한 <축적의 시간>에서 김 교수는 바다에 떠다니는 구조물을 만드는 것은 동일하지만 선박과 해양플랜트는 산업적 속성이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해양플랜트는 선박산업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복잡하다. 정해진 항로를 ‘선’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장소에서 ‘점’처럼 설치된다. 특정 장소의 해류·지형·구조 등에 대한 설계가 더 면밀히 이뤄져야 하고, 위험부담도 크다. 돌발상황이 많아 교과서에 나온 지식보다는 현장에서 갈고닦은 숙련기술에 더 의존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해양플랜트 산업은 엔지니어링, 구매, 시공, 설치 4단계로 나눠 세계 여러 업체들이 협력해 사업을 진행한다. 사업의 규모가 큰 만큼 돌아오는 이득도 크다. 국내 업체는 이 중에서 ‘시공’ 분야에서 탁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국내 업체들은 해외 업체와 꾸준히 협력하며 다른 영역의 해양플랜트 관련 기술을 차근차근 쌓아가기보다 이 4단계를 독점해 일거에 큰 이익을 얻고자 했다. 김 교수는 “(엔지니어링, 설계 등의 기술을 익히려면) 외국 회사들과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들이 가진 교과서 밖 경험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그 과정을 생략하고 1~2년간 우리 자체적으로 해보겠다며 무리수를 던졌다. 엔지니어링이 잘못되면 구매가 잘못되고 시공을 위한 제작 시수가 달라진다. 건축과 마찬가지로 해양플랜트도 안전문제 등으로 중간중간 설계변경 등이 필요한데도 이런 문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지난 1~2년간 조선소가 큰 손실을 입었다”고 서술했다. ‘조급증’으로 벌어진 참극이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업체끼리 저가수주 경쟁이 이어졌다. 업계에서는 “4조원 하는 해양플랜트를 한국 업체에서는 3조원이면 할 수 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고도의 기술과 국제분업체계로 이뤄진 해양플랜트 산업에서 저가수주와 설계변경으로 공기를 단축하고 이득을 내는 기존의 영업방식을 추구하다 산업 전체가 부실화됐다.

대기업이 무리하게 해양플랜트 산업에 진출하면서 조선업계의 노동환경은 ‘하청화’가 가속화됐다. 조선업계 하청노동 비율은 IMF 외환위기 첫해인 1998년부터 인건비 절감을 위해 증가하다가 2008년부터 급증하는 모양새를 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보였던 것은 대기업뿐이지 국내 조선업계 전체는 빅3 중심 구조가 강화되면서 더 나빠진 상태였다. 특히 금융위기의 여파와 키코 피해로 중소 조선업체가 줄도산하면서 이곳의 인력들이 대기업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대부분 ‘사내하청’으로 채용됐다. 박종식 금속노조 객원연구위원은 지난해 발간한 금속노조 이슈페이퍼에서 “하청 기능직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2000년 2만5960명에서 2013년 10만5041명으로 거의 4배 정도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박찬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해 9월 <노동리뷰>에서 분석한 것을 보면 조선업 하청근로자의 76%가 소위 빅3라 불리는 대형 조선소 소속이었다. 빅3 조선업체의 사내하청 근로자는 2008년 이후 약 3만5000명 순증했는데, 이는 중형급 조선소들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어 내보낸 인력들이었다. 하청인력 활용 비중은 조선업 68%, 해양플랜트업 90%로 해양플랜트에서의 하청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거제시에서 만난 한 시민은 “우리는 명찰만 봐도 누군지 안다. 직영 근로자는 명찰에 회사 이름과 더불어 과장, 부장, 팀장 등 명확한 직함이 달려 있다. 협력업체와 하청 직원들은 ‘○○산업’, ‘○○개발’ 등 간단하게 표시된 명찰만 달고 다닌다”고 말했다. 사내하청 기업에서는 작업량이 갑자기 많아지는 경우 소위 ‘물량조’라고 불리는 임시근로자들을 투입했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해양플랜트 산업에서 거꾸로 임시 일용직 활용이 만연했고, 하청기술자들은 중소기업에서 갈고 닦은 숙련기술을 활용할 기회가 봉쇄됐다. 위험한 작업을 도맡아 하면서 산재 확률도 높아진 반면, 직영업체의 위험한 작업 대처능력은 감소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2013년 정부가 해양플랜트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지정하고 대규모 지원을 약속하면서 상황이 열악한 기업마저 해양플랜트 산업에 뛰어들었다.

‘하청노동자’들은 거제 경제의 뇌관이기도 하다. 협력업체를 포함하면 대우조선해양에는 약 4만2000명이 근무한다. 대우조선은 3만명 선까지 줄일 계획이다. 정리될 1만명은 대부분 협력업체, 하청 직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기업이 급속하게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하청’을 동원했고, ‘하청’이 만연하면서 숙련기술이 필요한 산업 자체의 경쟁력이 부실화됐으며, 위기가 닥치자 ‘하청’을 방패막이로 세우는 셈이다.

파국의 고통은 전 지역 전 연령대에 미치고 있다. 고현동에서 만난 한 실업계 고교 3학년 학생은 “거제에서는 취업이 잘 되지 않을 것 같다. 울산의 중공업 관련업체에도 서류를 넣었다. 업계 자체가 워낙 불황이라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21일 고현동의 한 치킨집에서 만난 조선소 직원들은 야반도주한 협력업체 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우조선 협력업체도 지난해 45곳이 폐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소에 부품·기계 등을 납품하는 창원, 포항 등의 업체에도 연쇄부실이 찾아와 ‘남동임해공업지대’ 전체가 도미노처럼 쓰러질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감돈다. 삼성중공업 협력업체의 한 부장급 인사는 “부장이면 내 밑의 사람들을 챙겨줘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200명을 100명으로 자른다고 해 나부터 살고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고 만다”며 쓰게 맥주를 들이켰다.

거제시가 집계한 전체 세금 체납 건수는 2014년 8만5893건에서 지난해에는 8만9397건으로 늘었다. 한전 경남본부가 집계한 거제지역 1개월 이상 전기요금 체납 가구 수의 경우 지난해 2월 연체 가구 수는 3352가구였으나 올해 2월에는 4157가구로 805가구가 늘었다. 실업으로 인한 실물경제의 위기는 아직 예고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1일 기자들과 만나 대우조선해양과 관련해 “구조조정이 시장과 채권단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어려움이 발생한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이 바람직하지만 채권단과 경영진이 책임을 떠넘기며 구조조정을 차일피일 미룰 경우 정부가 개입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시사한 것이었다.

한계기업 퇴출이 ‘부실기업’ 정리와 ‘노동자 대량해고’가 아니라 산업을 부실하게 만든 원인을 근본적으로 수술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축적의 시간>에서 김용환 교수는 “해양산업은 길게 보고 장기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며 기업에 인력을 공급하는 데 급급했던 공학교육을 벗어나, 개념설계 등 지식을 축적할 수 있도록 산학협력 등을 모두 재구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종식 연구위원은 “(구조조정뿐 아니라) 신규수주 및 물량지원, 선박금융 지원체계 구축, 선종 다각화 및 연구개발 지원, 고용보호 및 고용안정화 방안 지원 등을 통한 조선산업 상생방안을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계기업 퇴출과 하청의 만연화 등을 맞바꿔 한국 노동·산업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는 것이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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