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사랑이 애국인 이상한 나라, 한국

윤민화 기자 2015. 7. 2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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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총수 일가가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과 다툼에서 승리한 것과 별개로 (삼성물산 합병 논란은)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의 오랜 재벌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는 새 증거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20일자 '삼성의 구사일생으로 드러난 재벌 체제의 문제점(Close shave for Samsung raises Chabol fears)'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는 근본적으로 한국의 불투명한 재벌 중심 기업지배 구조 탓이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7월11일자 "삼성 재편성하기(Reconstructing Samsung)"

"한국 정부는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며 재벌 편애 관행을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연금공단의 합병 찬성은 이 약속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국민연금공단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과 서스틴베스트(의결권 자문기구)의 권고도 무시했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 7월 20일자 "한국의 삼성 분수령(Korea's Samsung Watershed)"

전 세계 언론이 한국 때리기(Korea-bashing)에 나섰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논란이 계기가 됐다. 온 나라가 합병 찬성에 발 벗고 나서면서 삼성 지배구조 지키기에 혈안이 된 것처럼 보였다. 이로 인해 국제 투자 금융 시장에서 코리아디스카운트(한국 기업 주가가 가치에 비해 저평가되는 현상)는 더 심해지고 있다.

한국 언론 다수가 국민연금공단에게 삼성 지키기에 나서라고 압력을 가했다. 일부 매체는 미국 투기자본이 한국 산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호들갑떨었다. 전 세계 115개 국가 3만9000여 기업에게 의결권 행사를 자문하는 ISS는 '투기자본 대변인' 쯤으로 취급받았다. 이 탓에 글로벌 금융투자자 눈에는 한국이 갈라파고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쯤으로 비춰지고 있다.

지난 17일 삼성그룹의 두 계열사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이 통과됐다. 최대 수혜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일가다. 이재용 부회장은 뉴 삼성물산 지분 16.5%를 보유한 최대주주가 됐다. 지주회사격인 삼성물산 지분을 끌어올리면서 이재용 부회장은 그룹 지배구조를 장악했다.

찬성표는 당초 예상보다 많았다. 이날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에는 의결권을 가진 주주 84.73%가 출석해 69.53%가 찬성표를 던졌다. 삼성물산 통합법인은 9월 1일 출범한다.

◇ ISS "소액주주 이익 무시하는 재벌 횡포"

ISS는 7월 3일자 보고서에서 "이번 합병으로 지배주주 일가는 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지배권과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로써 지배주주는 소액주주가 손해를 보더라도 자기 이익은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분석했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06%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삼성전자 지분 4%를 갖고 있다. 삼성물산 지배권만 접수하면 이재용 부회장 일가는 삼성전자 지분 8.06%를 확보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업체로 삼성그룹의 기함이다. 외국 투기자본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 지배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이번 합병으로 그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제 의결권 자문기구 글래스루이스(Glass Lewis)도 이번 합병을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지배주주의 재벌 놀음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글래스루이스는 지난 7월 1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번 합병은 삼성물산에 대한 전략적 이익보다 제일모직과 이재용 부회장 일가 이익에 더 부합한다"며 "독립 주주 입장에선 납득할 수 없는 경영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김우찬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이번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이 본인 이익을 위해 벌이는 자기 거래일 뿐"이라며 "주주이익과 완전히 어긋나는 결정"이라고 말했다.

◇ 재벌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경제

합병 논란 내내 삼성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원일 제브라 투자자문 대표는 "국내에 삼성의 도움을 받지 않은 기업이나 개인이 드물다"며 "(이번 합병은) 삼성이라 가능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는 재벌과 함께 성장했다. 국내 기업지배 구조는 재벌 체제로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 재벌 총수가 대주주로서 경영권을 독점하는 행태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다. 이원일 대표는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의 재벌 기업지배 구조를 이해하기 힘들다"며 "수익이 나지 않으면 국적에 상관없이 주주의결권을 통해 기업을 매각하는 것이 국제 규범이다"고 설명했다.

경영권 승계 문화는 국제 사회 기류와 동 떨어져 기업 경쟁력을 퇴보시킨다는 의견이 다수다. 삼성, 현대차, SK, 한화 등 한국 재벌이 이에 해당한다. 김우찬 교수는 "엘리엇은 합병에 반대하는 다른 주주와 같은 논리를 폈을 뿐이다"며 "더 비겁한건 (삼성과 영업관계를 고려해 찬성표를 던진) 국내 기관 투자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원일 대표는 "엘리엇은 지배구조 펀드로서 단순한 이익 극대화가 최우선 목표"라며 "엘리엇이 삼성 경영권을 침해하려 한다는 주장은 낭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엘리엇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주주 친화적 접근 방법을 택하지 않아 아쉽다"고 덧붙였다.

한편 삼성물산 최대주주 국민연금공단은 17일 주총에서 합병 찬성 입장을 서면으로 통고했다. 하지만 찬성 사유는 밝히지 않았다. 이원일 대표는 "국민연금공단이 주총이 끝난 뒤에도 찬성 이유를 밝히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우찬 교수는 "국민연금공단의 찬성은 지난 10년간 선례를 모조리 무시한 결정"이라며 "삼성이라는 기업 하나에 국가 기관까지 동조하는 모습은 국제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원일 대표는 "수십년 뒤 이번 합병 사태를 돌아봤을 때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큰 변환점으로 남을 것"이라 말했다.

윤민화 기자 / minflo@sisa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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