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정도전> 제작 총괄한 김형일 KBS 책임프로듀서 "드라마 <정도전>의 주제요? 정치가 혐오스러워도 꼭 필요한 게 정치죠"

김윤현 기자 2014. 8. 5. 16:0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KBS 인기 대하사극 < 정도전 > 이 지난 6월말 50회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 정초 첫 회가 전파를 탔으니 꼭 6개월간 안방극장을 주름잡았던 셈이다. < 정도전 > 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거나 혹은 잘 몰랐던 역사인물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면서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정도전을 비롯해 이성계, 정몽주, 이인임, 이방원 등 고려 말 조선 초의 격동기를 살다간 당대의 거물들이 연기자들의 혼신의 노력으로 빛 바랜 사료(史料) 속에서 뛰쳐나왔다. 마치 오늘날 현실정치 속 인물처럼 사실적이었다. 역시 웰메이드(Well-made) 드라마의 힘이다. < 정도전 > 제작을 총지휘한 김형일 KBS 드라마국 책임프로듀서(Chief Producer·이하 CP)를 만나 드라마 행간에 깔린 숨은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저것이 조선의 하늘이다. 저 하늘을 열어젖힌 것은 백만대군의 창검이 아니라 꿈이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이었다. 자랑스런 삼한의 백성들이여, 이제 다시 꿈을 꾸자. (중략) 이것이 그대들의 대업, 진정한 대업이다."

드라마 < 정도전 > 마지막 회의 엔딩신은 정말 묵직하게 가슴을 때렸다. 주인공 정도전 역을 맡은 배우 조재현이 요동정벌군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듯 외친 대사는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꿈꿨던 이상을 압축적,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총 50부작의 대작을 마무리하는 장면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런 걸 두고 유종(有終)의 미라고 하는 법이다.

김형일 CP의 말이다. " < 정도전 > 엔딩신은 정도전의 꿈을 요약해낸 것이지만, 우리 국민들도 꿈과 이상을 가져보자는 제작진의 메시지를 담은 것이기도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꿈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김형일 CP는 의미심장한 명제를 하나 툭 던졌다. "역사는 과거의 정치이고, 정치는 현재의 역사입니다." 한마디로 역사와 정치는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과거의 정치행위가 켜켜이 쌓여 이룩된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의 정치행위 하나하나는 바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 사진 : 이신영

정통사극은 정치를 주제로 다뤄야

그의 사극관(觀)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이른바 정통사극은 정치를 주제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고로 정통사극은 정치사극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두말할 것 없이 < 정도전 > 은 정치사극이었다.

"정통사극은 사료(史料)나 복식(服飾)을 고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차적으로 정치를 다뤄야 합니다. < 정도전 > 은 빗대자면 사극의 틀을 입은 '100분 토론' 같은 드라마였습니다.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주제를 놓고 계속 대화하지 않던가요. 초반부에는 정도전과 이인임, 중반부 이후에는 정도전과 정몽주가 서로 팽팽하게 대립각을 세우면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논전을 벌였죠. 물론 드라마 속 대사는 사료에 없는 겁니다. 제작진과 작가의 유추와 해석이 담긴 거죠. 사실 사료에는 역사인물 개개인의 성격이나 행위 동기에 대한 서술은 거의 없어요. 그 때문에 사극 제작진은 사료의 행간을 통해 역사인물의 성격을 읽어내는 유추와 해석을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래야만 역사인물을 살아있는 캐릭터로 구현해낼 수 있어요. 사실 그게 사극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죠. 시청자들이 등장인물에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언제부턴가 안방극장을 차지하는 사극은 온통 '퓨전사극' 일색으로 바뀌었다. 남녀 주인공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 로맨스 구도와 말랑말랑한 감성적 대사로 가득한 게 퓨전사극의 대체적인 특징이다. 몇몇 흥행작을 통해 퓨전사극이 큰 인기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퓨전사극은 역사보다 허구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 정도전 > 은 퓨전사극 일변도의 흐름을 끊어내고 정통사극의 부활을 알린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KBS 내부에서는 오랫동안 부진을 면치 못한 KBS 사극이 < 정도전 > 을 발판으로 옛 위상을 되찾게 됐다며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다.

"사실 처음부터 정통 정치사극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려고 작심했었죠. 그게 < 정도전 > 을 기획하면서 처음부터 의도한 바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터닝포인트'를 마련한 것 같아 만족스럽습니다."

드라마 < 정도전 > 제작의 단초는 4년 전에 마련됐다. 김형일 CP의 후배인 강병택 PD가 어느 날 정도전이라는 역사인물을 다뤄보면 어떻겠느냐며 의견을 물어왔다. 강 PD는 과거 큰 인기를 끌었던 대하사극 < 용의 눈물 > 에서 조연출 경험을 한 바 있다. 그러다 2년 전쯤 김 CP와 강 PD가 의기투합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김 CP는 강 PD에게 정치사극 혹은 토론사극 형식으로 가보자고 방향을 제안했다. 결국 김 CP와 강 PD는 각각 < 정도전 > 의 제작 총괄 책임자와 연출자로 역할을 분담해 멋들어진 앙상블을 이뤄냈다.

사실 '고려 말 조선 초'는 가장 극화하기 좋은 시대 중 하나로 꼽힌다. 한 나라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나라가 열린 보기 드문 격동기였던 데다, 우리 민족 역사상 드물게 통일왕조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성공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성계와 최영, 정도전과 정몽주라는 무(武)와 문(文)으로 일가를 이룬 걸출한 영웅들의 대결구도 역시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면 이 시대가 종종 드라마로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다소 진부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김 CP는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체험적으로 깨달은 '8대2 법칙'으로 성공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수완을 과시했다. 그가 말하는 '8대2 법칙'은 뭘까. 쉽게 말하면 어떤 소재를 드라마로 만들 때 80%는 알려진 것, 20%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버무리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드라마 < 정도전 > 은 우리 국민이 익히 아는 시대를 다뤘지만 완전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김 CP는 다시 한번 자신의 법칙이 유용함을 증명한 셈이다.

"역사 드라마는 인물의 성격을 잘 되살려내는 한편 여러 인물의 성격을 적절하게 포지셔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각각의 인물에 치우침이 없도록, 또한 논리적 타당성이 있도록 주문했습니다. 특히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 아니라 '이인임을 위한 변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죠. < 정도전 > 에서는 이상(理想)과 대의(大義)의 반대편, 즉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이 이인임입니다. 이인임은 현실이 결코 만만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캐릭터죠. 드라마 속 이인임은 정형화된 절대악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악역이기에 설득력을 갖습니다. 시청자들이 이인임에 호응을 보낸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김 CP는 < 정도전 > 이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은 비결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외견상으로 보면 우선 기획 포인트, 훌륭한 극본, 효율적 연출, 절정의 연기력이 조화를 이룬 점을 꼽을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드라마의 주제의식도 매우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 < 정도전 > 의 성공비결은 결국 드라마가 담고 있는 '보편성'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나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정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죠. 국가, 권력, 리더십의 문제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의 관심사라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 정도전 > 의 밑바탕에 깔아뒀죠. 극중 정몽주의 대사 중에 '아무리 정치가 혐오스러워도 정치는 꼭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생각했던 주제죠."

< 정도전 > 의 극본을 쓴 정현민 작가는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라는 이색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10년간 진보 정당과 보수 정당을 넘나들며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을 경험한 덕분에 '현실정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 김 CP가 정 작가를 발탁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치적인 안경'을 끼고 사료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사극을 표방한 < 정도전 > 의 극본을 잘 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주요 등장인물의 대사에 현실정치적 요소를 잘 스며들게 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이인임을 꼽을 수 있다.

- 드라마 < 정도전 > 의 주요 배역이 함께한 포스터. (사진 제공 : KBS)

국내 사극 사상 최초로 다큐멘터리 결합 시도

김 CP는 드라마 < 정도전 > 을 통해 몇 가지 실험적인 시도도 했다. 매회 드라마 말미에 2분짜리 다큐멘터리를 편성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라는 서로 다른 장르를 결합시킨 것이다. 이 짧은 다큐멘터리는 드라마의 배경이나 등장인물과 연관된 유적과 유물을 조명하면서 역사적 사실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냈다.

"국내 사극 사상 최초의 시도였죠. 일본 공영방송 NHK는 매년 시대정신을 반영한 대하사극을 한 편씩 내놓곤 하는데, NHK 사극도 짤막한 다큐멘터리를 활용합니다. 그걸 좀 벤치마킹했죠. 이런 방식을 시도한 이유는 '역사는 그저 먼 옛날의 일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살아 있다'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 의도에서 다큐멘터리에 일반 시민들도 자주 등장시켰죠. 이 시도는 여러모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유적이나 유물이 소재한 지방자치단체는 관광객 증가라는 뜻밖의 소득을 얻기도 했죠. 어떤 지자체는 관광객이 10배나 늘었다는 소식도 들었어요(웃음)."

김 CP는 < 정도전 > 이 한창 방영되던 지난 5월초쯤 경영진에게 차기 대하사극 제작에 대한 재가를 받았다. 내년 정초 KBS 1TV를 통해 시청자를 찾아갈 새로운 야심작은 < 징비록 > (가제)이다. 드라마 < 징비록 > 은 조선 선조 시절 영의정을 역임한 서애 유성룡이 1592년에서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戰況) 등을 자세히 기록한 동명의 회고록 < 징비록(懲毖錄) > 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 책은 참혹한 전란을 두 번 다시 겪지 않도록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실책들을 반성하는 한편 앞날을 대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쟁은 정치의 또 다른 형태 중 하나입니다. 정도전이 세운 나라 조선이 건국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라는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이 국난을 극복해내고 국가를 다시 세워나가는 과정을 드라마 < 징비록 > 을 통해 풀어내고자 합니다. 서애 유성룡 선생은 국난 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한 명재상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 중기 최고의 경세가(經世家)로 꼽힙니다. 마침 2015년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여서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작품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김형일 KBS 책임프로듀서는 "정통사극은 역사인물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인간탐구가 본질이자 시청자의 공감을 얻는 동력"이라고 말했다.

▒ 김형일 CP는…

1965년생. 1990년 서울대 법대 졸업, 92년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93년~현재 KBS 드라마국 프로듀서. 주요 작품: < 구미호 외전 > , < 프레지던트 > , < 솔약국집 아들들 > , < 꽃보다 남자 > , < 전우 > 등.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임톡beta

해당 기사의 타임톡 서비스는
언론사 정책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