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히스토리] 대우그룹서 대우조선까지.. 부실 덮는 '검은 손' 똬리

김지방 기자 입력 2016. 6. 2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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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회계의 역사 들여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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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회계란 말부터 없애야 합니다.”

금융감독원에서 간부까지 지내고 퇴직한 한 공인회계사는 23일 최근의 기업 부실 사태에 분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회계 사기(詐欺)라고 정확하게 불러야죠. 분식이란 말은 기업의 책임을 가리는 표현입니다.”

분식회계(粉飾會計)는 기업이 부실을 숨기기 위해 회계판단을 임의로 바꾸고 때로는 재고수치나 문서까지 조작해가며 수치를 꾸미는 것이다. 엄연한 범죄인데 ‘분식’이란 표현 때문에 마치 장부를 약간 고쳐쓰는 가벼운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외화위기에 등장한 분식회계

국내에서 분식회계란 말이 널리 쓰인 것은 1997년 외환위기 때였다. 대우그룹이 대규모 부실을 감추기 위해 회계장부를 꾸민 것을 두고 금융감독원 등에서 분식회계(粉飾會計)라고 지칭했다.

단어가 낯설어 국수나 빵을 먹는 ‘분식(粉食)’으로 알아듣고 밀가루 반죽처럼 실적을 부풀린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헤프닝도 있었다. ‘회계 분장(make-up accounting)’, ‘겉치레 결산(window-dressing settlement)’, ‘조작 회계(creative accounting)’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어권 표현을 보면 의미가 명확하다. 짙은 화장으로 결점을 감추듯 회계 장부를 조작해 기업 부실을 덮었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분식회계라 번역한 것을 한국에서 그대로 들여와 쓰고 있다.

분식회계의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외환위기 때 해체된 대우그룹이다. 당시만 해도 대우는 삼성을 제치고 현대에 이은 제계 2위의 재벌이었다. 외환위기로 대우그룹이 흔들리자 은행들이 기업을 되살리기 위해 현장 실사를 했는데, 12개 계열사의 장부에만 기록되고 실제로는 찾을 수 없는 돈이 42조9000억원이나 되었다. 1999년 12월 금융감독원은 ‘대우그룹 분식회계 조사·감리 특별반’을 만들었다. 공인회계사를 비롯한 26명이 9개월 동안 대대적인 조사를 벌인 결과, 모두 22조9000억원이 부풀려진 것으로 결론지었다. 언론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분식회계”라며 경악했다.

분식회계 백화점이었던 대우그룹

대우그룹은 분식회계의 교과서이자 백화점이었다. 차입금 등 부채를 고의로 누락한 것이 15조원, 받을 수 없는 채권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하거나 있지도 않은 채권을 있는 것처럼 계산한 금액이 4조원, 재고를 부풀려 자산이 많은 것처럼 조작한 금액이 2조원이었다. 공사 원가를 낮게 잡아놓고 공사진행률을 실제보다 과대포장해 수익이 크게 난 것처럼 조작한 사례는 수십년 동안 관행처럼 행해져 얼마나 부풀려졌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대우자동차는 납품 받은 부품을 차 만드는데 쓰고 나서도, 비용로 기록해야할 것을 여전히 창고에 쌓여 있는 것처럼 장부에 남겨, 비용은 실제보다 줄이고 자산은 부풀렸다. 동유럽에 자동차 공장을 만들 때에도 분식회계를 동원했다. 제조설비를 수출하기 전에 선수금으로 받은 돈을 설계도면 대가 등으로 기록해 공사가 진행되는 것처럼 꾸몄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의 선수금은 부채이지만, 공사가 진행되면 매출 이익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80년대 리비아 공사를 위해 대우그룹에 영국에 설립한 법인 BFC(British Finance Center)는 세계를 무대로 분식회계를 저지르는 중심축이었다. 대우 계열사들이 해외 거래에서 벌어들인 돈(수금액)을 BFC 계좌에 입금했다. 국내 회계장부에는 수금 사실을 적지 않고 여전히 받지 못한 것처럼 남겨뒀다. 국내 장부에는 채권금액이 부풀려 남아 있었고, BFC에는 현금이 모였다. 대우그룹은 “원활한 자금 융통을 위해 국내에 들여오지 않고 해외에 남겨둔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금감원은 명백한 분식회계이자 비자금이라고 판단했다.

16년전과 닮은 꼴

그 뒤로도 대규모 분식회계 사건이 끝없이 이어졌다. 2003년 3월 SK그룹은 은행명의의 채무잔액증명서를 위조해 1조1000여억원의 은행빚을 없는 것처럼 처리해 대차대조표를 허위로 꾸몄다가 검찰에 발각됐다. 당시 검찰은 “무역회사로 자금이동이 활발하고 소액주주와 특수관계인으로만 주주가 구성된 SK글로벌에 그룹의 부실을 모았다”며 “수십년간 부실이 누적돼 사실상 자본잠식상태”라고 밝혔다.

2014년의 모뉴엘 사태는 분식회계의 결정판이었다. 빌 게이츠가 혁신기업이라고 극찬하고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성공사례로 꼽히며 연 매출 1조원을 넘어선 업체가 돌연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원의 조사 결과 수출 실적을 부풀려 은행에 가짜 채권을 팔아넘긴 사실이 드러났다. 매출의 90%에 이르는 2조7397억원이 가짜였다.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에서도 16년전 대우그룹과 유사한 사례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애초 지난해 7월 대우조선이 2분기 실적을 보고하면서 3조원대의 대규모 손실을 보고했을 때만해도 의도적인 분식회계보다는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 불거진 손실을 뒤늦게 장부에 반영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힘을 얻었다. 하지만 검찰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은 대우조선이 세계경제 악화로 선박이나 해양플랜트 계약이 해지돼 손실이 명백한 경우에도 이를 반영하지 않거나 도리어 이득으로 둔갑시킨 경우도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떨치기 어려운 유혹

부실이 생겨 기업이 어려울 때도 장부를 조작해 채권자나 주주의 눈을 속이려는 유혹을 받지만, 큰 이익이 생겨도 세금을 줄이고 배당을 안 하려고 분식회계의 유혹을 받는다. 대규모 분식회계 사태가 벌어지면 정부와 시민단체, 국회에서도 회계제도 개선 대책을 내놓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2001년 대우그룹 사태 당시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 금감원이 합동으로 분식회계 근절방안을 내놨다. 외부감사를 강화하고 감사의 품질을 높여 분식회계를 제때 적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2012년 경제개혁연구소가 내놓은 ‘19대 국회 회계제도 개선방안 입법과제’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하고, 지난 22일 치러진 한국공인회계사회 총회에서도 여전히 외부감사 강화와 품질 향상이 쟁점이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대우그룹 사태와 같은 일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제도를 도입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며 “외부의 감시·감독은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제때 경고를 울려주는 용기를 높이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야 한다”고 지적했다.

분식회계는 적발하기도 힘들지만, 판가름하기도 애매한 경우가 있다. 경제개혁연구소 이총희 연구위원은 “쌍용자동차가 2009년 대량해고를 했을 때에는 미래의 위기를 미리 회계에 반영하는 보수적인 회계처리로 문제가 되었는데, 대우조선 사례에선 부실을 미리 반영하지 않은 낙관적인 예측이 문제였다”면서 “분식회계를 밝혀내야하는 회계감사는 어렵고 고민되는 일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분식회계 사건이 터지면 이를 적발하지 못한 회계법인들이 지탄을 받곤 한다. 한 대형회계법인 관계자는 “기업이 분식회숨기려 맘먹으면 외부감사에서 적발해내기가 쉽지 않다”면서 “회계사들간에도 수주 경쟁이 치열해 갈수록 더 짧은 기간에 더 적은 비용으로 감사를 하도록 내모는 여건부터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작 회계 부정을 저지른 기업은 사면을 받고 회계사들만 소송을 당하고 처벌을 받는 풍경을 보면 입맛이 씁쓸하다”고 토로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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