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부터 알바까지, 모조리 위기인 한국경제

박은하 기자 입력 2016. 5. 28.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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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3곳 중 1곳은 부실징후기업, 가계부채 1223조원 돌파, 청년 실업률은 사상 최고치

충북에 사는 홍승희씨(58·가명)네 식구들의 가계소득은 실업급여와 산재보험금, 그리고 간병인으로 일하는 홍씨의 150만원 남짓한 월급으로 구성돼 있다. 중소기업에 다니다 퇴직한 후 공공근로를 하던 홍씨의 남편(61)은 허리를 다쳐 넉 달째 일을 쉬고 있다. 2년 동안 서울 IT기업에 다니던 큰딸(31)은 계약만료로 새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 실업급여로는 서울의 월세 50만원을 대기 어려워서 홍씨가 보태준다. 그래도 ‘경력직 재취업’은 조금이라도 낫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본다. 어문계열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한 번도 취업해 본 적 없는 둘째딸(26)은 평생 아르바이트만 할까 걱정이다. 한동안 딸의 방에 청소하러 들어가면 이력서들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력서조차 없다. 기업들이 뽑지 않는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홍씨는 자신이 아플까 걱정이다. 홍씨마저 앓아 눕는다면 가계는 휘청인다.

대기업 6년차 사원인 박형우씨(31)는 최근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박씨는 “재무팀에 있어서 매일같이 야근하는 등 워낙 일이 힘들기도 했지만, 곧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돌아서 흉흉하다. 조금이라도 젊고 능력 있을 때 도망쳐 나오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3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가 있지만 결혼은 아직 생각 없다. 일단 직장부터 새로 잡는 것이 급선무다. 서울 유명 약대를 졸업한 정현성씨(31·가명)는 최근 2년 가까이 운영하던 약국을 폐업했다. 한 건물에 경쟁약국이 생기면서 매출액이 뚝 떨어졌다. 결혼은 했지만 임신계획을 무기한 미뤘다. 결혼 당시 집을 마련하느라 진 빚도 갚으려니 눈앞이 캄캄하다. 정씨는 “오직 안정성만 보고 약대를 갔는데 굉장히 허탈하다. 한국에 안정적인 일자리, 먹고살 길이 있나 싶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는 지금 어떤 상황일까. ‘제2의 IMF’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IMF 위기 때처럼 부실기업의 연쇄도산 우려가 감지되는 동시에 20년 전에는 없었던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20대 국회에서 ‘구조조정’, ‘사회적 대타협’과 같은 말이 오가는 이유다. 계층을 넘어선 ‘총체적’ 위기다.

부실기업이 크게 늘었다. 2007년 4곳 중 한 곳이 3년간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부실징후기업’이었다. 한국은행의 최신 통계를 보면 지난해 부실징후기업은 3곳 중 한 곳 수준을 넘어섰다. 36.0%가 부실징후기업이다. 3년 연속 이자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만성적 한계기업 비중은 2009년 8.2%(1851개)에서 2014년 10.6%(2561개)로 2.4%포인트 상승했다. 비제조업 중에서는 운수업과 건설업종에서, 제조업에서는 조선·철강업종에서 만성적 한계기업 비중이 크게 상승했다. 위험기업 수 비중은 조선(62.5%)·건설(28.7%)·철강(24.2%)이 높고, 위험부채액 비중은 조선(93.7%)·운수(53.9%)·기계장비(38.5%) 업종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영세기업만 한계기업 혹은 부실징후기업이 되는 것도 아니다. 20대 기업집단에 속한 기업 중 37%가 부실징후를 보이고 있다. 4개월 연속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STX가 대표적이다. 조영철 전 국회 예산정책처 사업평가국장은 “재벌 대기업과 수출·제조업 위주 체제에 의존한 기존의 성장체제가 한계에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조선업의 경우 중국의 추격에 대응하는 데 실패했고, 섣불리 해양플랜트 산업에 뛰어들었다가 부실을 키웠다. 경제개혁센터에 따르면 20대 기업 가운데 부채비율이 200%가 넘고, 이자보상비율이 1배 미만인 그룹은 2007년 2곳에서 2014년 10곳으로 늘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범4대 그룹을 제외하면 재벌·대기업도 셋 중 하나는 부실상태”라며 “2008년 이후 부실이 만성화됐다”고 말했다. 2008년 경제력 집중과 재벌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기업 구조조정 대신 4대강, 자원외교 등의 미봉책으로 위기를 넘어간 데다, 3세 승계한 후계자들이 기업가 정신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중국의 추격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정부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높다. ‘조선업’ 위기의 시발점이었던 대우조선해양의 재무상황이 악화되자 2015년 10월 임종룡 금융위원장을 비롯해 기획재정부 장관, 금융감독원장,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참석한 이른바 소위 ‘서별관회의’(비공개 경제금융점검회의)에서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4조2000억원 지원이 결정됐다. 지금까지 운영자금 2조8000억원이 지원됐고, 4000억원의 유상증자도 이뤄졌으며, 향후 1조원이 추가 집행돼야 한다. 이 정도의 대규모 자금을 지원했는데도 대우조선해양의 재무상황 악화의 원인이나 부실 책임에 대한 규명은 불투명하다. 대우조선해양의 부채비율이 2014년 530%에서 2015년 4266%로 급증하고, 2015년 산업은행의 대우조선해양 부실채권이 급증한 데는 산업은행의 책임만이 아니라 정부의 책임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강도 높은 산업 구조조정과 정부의 관리 부실에 대한 책임 규명 필요성이 동시에 제기되는 것이다.

민간경제 수치도 나쁘다. 한국은행 발표 자료를 보면 국민이 진 가계빚 총액이 3개월 새 20조6000억원이나 늘어 지난 3월 말 기준 1223조원을 넘어섰다. 1분기 비은행예금취급사의 기타대출은 4조9000억원 늘어 154조원을 기록했다. 상대적으로 생계가 힘들고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이 대출을 늘린 것으로 보인다. 자영업자 폐업률도 높은 수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자영업자 수는 556만3000명으로 전년보다 8만9000명 감소해 1994년 이후 가장 적었다. 연간 자영업자 감소폭은 2010년(11만8000명) 이후 가장 컸다. 완연한 내수침체 국면이다.

지난해 청년 실업률이 9.2%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자연증가 인구는 43명9000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출생아 수가 역대 네 번째로 적었고, 합계 출산율은 1.24명으로 ‘초저출산’ 기류는 계속되고 있다. 돈이 돌지 않고, 미래를 위한 활동이 중단됐다. 재벌부터 구멍가게 주인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까지, 모두 위기에서 비켜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노동계에서도 ‘일자리 보호’나 ‘구조조정 반대’를 넘어서 총체적인 개혁을 주문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장인숙 한국노총 고용정책국장은 5월 25일 서울 고려대 안암캠퍼스에서 열린 토론회 ‘위기의 한국경제와 노동’에서 “우리 경제·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통합이 요구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경제민주화, 사회안전망 확대, 공평과세 조세개혁,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실노동시간 단축, 노동기본권 확대 보장 등이 곧바로 시작돼야 한다”며 “경제민주화, 사회안전망 확충, 일자리 유지 및 창출, 산업구조 재편을 위한 국회 차원의 노·사·정 사회적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안재원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같은 자리에서 조선업을 예로 들며 정부에 노동정책과 연계된 강력한 산업정책을 주문했다. 안 연구위원은 “기존 사업을 폐기하고 어떤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서 현재 조선산업만큼의 고용을 창출하는 역할을 하는 산업을 찾기는 어렵다”며 “조선산업의 지속성장이 가능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산업적 차원의 과제들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정부와 이해당사자인 노동조합의 의견을 수렴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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