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필요한지 입닫고, 누가 낼지 따지는..'앞뒤 바뀐 구조조정'

2016. 5. 2.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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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뉴스분석 l 정부-한은 ‘구조조정 재원’ 공방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일 경제장관-경제단체장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로 들어서고 있다. 이정아 기자 <A href="mailto:leej@hani.co.kr">leej@hani.co.kr</A>

4·13 총선 직후 속도를 내던 정부발 부실기업 구조조정 드라이브가 ‘국책은행 자본확충’이란 암초를 만났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누가 분담할지를 놓고 정부와 한국은행은 연일 대립각을 세우며 설전을 벌이는 중이다.

정부는 ‘한국판 양적완화’ ‘선별적 양적완화’란 이름으로 한은이 나서줄 것을 연일 압박하고 나섰다. 반면 한은은 정부가 구조조정의 밑그림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한은의 발권력을 손쉬운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데 대해 큰 불만을 드러냈다. 두 기관은 4일 열릴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체’에서 세부 방안을 논의한다는 원칙은 세웠으나, 각자의 속내는 동상이몽에 가깝다.

정부 “추경은 시간 걸리니 한은 출자나서야”
국무회의 의결로 가능한 현물출자도 있어

■ 정부, “자본확충, 한은의 의무” 정부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은행 부실과 그에 따른 자금시장 경색에 한은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하며, 이는 한은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한국판 양적완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박근혜 대통령), “재정과 통화의 ‘폴리시 믹스’(정책조합)를 검토하고 있다”(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는 발언도 그런 맥락이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스스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선 뚜렷한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지난달 29일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코코본드(조건부 자본증권) 발행 계획을 내놓기는 했으나, 이는 수십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필요 재원 규모에 견주면 큰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일부에선 정부가 한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가 재정 투입 방식은 시간이 걸리고 국회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으로 본다. 추가경정(추경) 예산을 편성하려면 국회 심의와 동의 절차를 밟아야 해서다. 임종룡 위원장이 국책은행에 대한 자본확충이 “시급하고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그러나 재정이 꼭 추경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정부나 공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을 출자하는 방식도 있다. 이런 현물출자는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가능하다.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지난해 말에도 정부는 9%대까지 떨어진 수출입은행의 자본비율(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1%포인트가량 끌어올리기 위해 정부가 보유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지분 일부(1조원 규모)를 수출입은행에 넘긴 바 있다.

이에 대해 기재부 예산실 고위 관계자는 “현물출자는 국책은행의 자본비율을 높일 수 있지만 현금으로 유동화시킬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며 “금융당국은 건전성과 유동성을 모두 확보하는 방안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다른 기재부 관계자는 “임종룡 위원장이 시급성을 이유로 한은의 참여를 주장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국유 재산 출자도 국책은행 자본 확충을 위한 신속한 수단의 하나”라고 말했다.

한은 “정부 요구는 구제금융이나 특별융자
예외적 상황이라고 판단할 근거 제시 안해”

■ 한은, “정보부터 달라” 한은 고위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한은은 구조조정을 해야 할 기업의 부실이 얼마인지, 어디까지 구조조정을 할 것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보고 산업은행을 도와주란 것인데 이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미국도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제너럴모터스(GM), 크라이슬러 지원은 정부 재정으로 했고, 에이아이지(AIG) 지원에 미국 중앙은행이 나섰으나, 이는 시스템 위기라는 전제가 있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한은의 인식은 중앙은행의 국책은행에 대한 자본 수혈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 즉, 정부가 한은이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으면서 발권력 사용만 채근하고 있다는 얘기다. 또다른 한은 관계자도 “의사가 와서 환자를 살리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 눈만 좀 뜨고 있게 해주시오’ 하는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무턱대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또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국책은행 자본확충은 정부가 먼저 재정을 쓴 다음 발권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은의 발권력 사용에 까다로운 절차를 두는 근본적인 이유는 발권력 남용을 우려해서다. 이번에 정부 요구를 수용해 국책은행을 지원한 행위가 선례가 되어, 앞으로도 유사한 상황이 되면 계속 끌려다니게 될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하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본래 의미와 거리 멀어
기재부쪽도 “양적완화 굳이 쓸 필요 없다”

■ “특정기업 구제금융은 양적완화 아냐” 다만 이런 공방을 거치면서 청와대가 언급한 ‘한국판 양적완화’의 뜻은 명확해졌다. 애초 이 표현은 4·13 총선 과정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공약으로 내걸면서 등장했다. 그 취지도 미국과 일본, 유럽에서 이미 실시했거나 진행 중인 양적완화 정책을 국내에 도입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기준금리 인하 여력이 있는 상황에서 양적완화가 필요한가’ ‘양적완화라는 비전통적 수단을 동원할 정도로 국내 경제가 문제가 많은가’라는 논쟁이 벌어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한국판 양적완화는 ‘국책은행의 자본확충을 위한 발권력 사용’이라는 의미로 정리됐다. 경기부양, 유동성 공급이라는 본래적 의미의 양적완화와는 거리가 먼 셈이다.

한은 관계자는 “(한국판 양적완화는) 특정 기업에 대한 ‘구제금융’이나 ‘특별융자’라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기재부 관계자도 “양적완화라는 표현을 굳이 쓸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은의 수출입은행 출자를 놓고 양적완화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김경락 정세라 기자 sp96@hani.co.kr

양적완화

기준금리가 0에 가까운 초저금리 상태에서 경기부양을 위해 중앙은행이 다양한 금융자산 매입을 통해 시중에 돈을 푸는 정책이다. 미국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시행했으며, 일본·유럽연합은 지금도 시행 중이다.

BIS 자기자본비율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은행의 위험자산(부실채권) 대비 자기자본의 비율을 말한다. 금융당국은 은행의 건전성과 안정성 확보를 위해 최소 10% 이상의 자기자본비율을 유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위험관리 수준에 따라 추가적인 규제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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