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닫는 면세점 뒤 눈물쏟는 2200명

채성진 기자 2015. 12. 2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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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한시법' 탈락한 2곳 직원들 "우린 어디로.." 경력 26년차 "김해공항점 폐점해 서울 왔더니 다시 날벼락" 신입사원들 "청년고용 절벽 겨우 넘었는데.. 또 백수되나" 5년 시한부 대못에.. 그들은 하루아침에 '잉여'가 됐다 - 80%가 여성 전문 인력 "5년 한시법 만든 의원, 꼭 만나 따져 묻고 싶다" "멀쩡한 정규직을 왜.." - 파견직은 더 서럽고 불안 "6월 소공점서 옮겨왔는데" "월세 30만원 신혼집은.."
그들에겐 우울한 연말연시 - 성탄절인 지난 25일 서울 잠실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에서 한 화장품 매장 직원이 진열 상품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월드타워점이 5년마다 면세점 사업권을 원점(原點)에서 심사하는 개정 관세법 적용으로 지난달 사업권을 잃고 내년 상반기에 문을 닫음에 따라, 1300여 직원의 실직 사태가 임박했다. 면세점 매장은 흑백으로 처리했다. /이진한 기자
서울 시내 면세점 심사에서 탈락해 실직 위기에 놓인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직원들이 성탄절인 이달 25일 오후 매장 앞에서 ‘5년 후 다른 누군가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는 글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멀쩡한 정규직을 5년짜리 계약직으로 만드는 ‘5년 한시법’을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이진한 기자

성탄절인 지난 25일 오후 서울 잠실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중국어·영어로 외국인 쇼핑을 도와주고 후배 직원을 가르쳐주다가 사무실로 돌아가던 김모(여·47) 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늦어도 내년 4~5월이면 여길 떠나야 하는데 다음엔 어디서 일이나 할 수 있을까…."

면세점 경력 26년 차인 김씨는 "김해공항 면세점이 2년 전 문을 닫아 작년 말 어렵게 서울로 옮겼는데 또 날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그는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는 남편을 놔두고 고 3, 중 2인 두 아들과 서울 신림동에서 살고 있다. "앞으로 인천공항점으로 갈지, 제주점으로 갈지 전혀 몰라요. 집값의 80%를 대출받아 서울에 집을 마련했는데 직장이 흔들리니 어떻게 갚을지 진짜 캄캄해요."

김씨는 "퉁퉁 부은 다리로 일하는 1만5000명 면세점 직원을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국회의원들이 '5년 한시법'을 1분 만에 날림으로 통과시키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청년 신입 사원들도 사정은 심각하다. 지난달 중순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이모(24)씨는 "1년 동안 잘 근무하면 정직원이 된다고 해 부모님과 함께 기뻐했는데, 입사 2주 만에 매장이 사업권을 잃어 '잉여 인력'이 됐다"고 허탈해했다. 그는 "고참 선배들 갈 곳도 없는 마당에 신입인 우리 동기 3명이 '감원 1순위'가 될 것 같다"며 "취업 벽을 넘자마자 다시 백수(白手)가 될 처지"라고 했다.

입점 업체 소속으로 면세점에 파견돼 있는 직원들도 자칫하면 직장을 잃을 판이다. 서울 광장동 SK워커힐면세점의 화장품 매장 직원 김모씨는 "내년 2월 14일로 폐점 날짜가 확정됐는데도 회사는 아무 대책 없이 '기다려라'고만 해 속이 터진다"고 말했다.

'5년 한시법'으로 사업권을 잃은 롯데 월드타워점과 워커힐면세점에 근무하는 2200여명의 실직(失職) 사태가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다. 두 면세점에서 일하는 350명의 정규 직원과 1850명의 파견 직원 등이 대상이다. 면세점 사업을 완전히 접는 워커힐 직원들은 다른 업무를 맡거나 새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월드타워점 직원들은 다른 점포로 옮겨야 하지만 대부분 정원이 꽉 찬 상태다.

"멀쩡한 정규직을 5년짜리 계약직으로 만드는 '5년 한시법'을 폐지하라."

크리스마스 캐럴이 흥겹게 울리던 지난 25일 낮 12시쯤 서울 잠실 제2롯데월드와 지하철 잠실역이 연결되는 지하통로. 흰색 마스크를 쓴 면세점 여직원 9명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5년 한시법 때문에 1만5000여 면세 노동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직원 80%가 여성입니다. 가사(家事)와 양육을 하는 우리 여성 직장인이 설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이달 9일부터 3~4명이 하루 1시간씩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던 이들이 처음 한데 모인 자리였다. 선물 꾸러미를 들고 가는 시민들을 응시하는 직원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직원 이모(40)씨는 "법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같은 피해자가 계속 나온다"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시위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김모(47)씨는 "5년 한시법을 만든 홍종학 의원을 꼭 만나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따져 묻겠다"고 외쳤다.

이날 오후 매장에서는 중국 관광객 한 명이 갑자기 넘어지는 사고가 났다. 면세점 직원들은 토사물이 기도(氣道)를 막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 중국어로 안정시키며 119대원이 도착할 때까지 응급조치를 했다. 롯데면세점 관계자는 "어떤 돌발 상황에도 차분하게 대처하는 10~20년 차 직원들의 노하우가 사장(死藏)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하루아침에 '잉여 직원'

직원들은 전문 영업직에서 하루아침에 정리돼야 할 '잉여 인력'이 된 현실에 낙담하고 있다. 워커힐 면세점 직원 박모(45)씨는 "10여년 면세점 업무 한우물만 팠는데 그게 한순간에 무너지는 심정"이라고 했다. 워커힐면세점을 운영하다 사업권을 잃은 SK네트웍스 측은 "최선을 다해 고용 승계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지만 기존 면세점 정규직원 190여명을 전부 다 흡수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이 직접 "면세점 직원들의 고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지만 뾰족한 해법을 못 찾고 있다.

폐점 예정인 두 면세점에만 매장을 둔 입점업체 소속 직원들은 극심한 불안증을 호소하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 화장품을 팔아온 16년 차 정모(39) 매니저는 "월드타워점이 커갈 것으로 보고 올 6월 소공점에서 옮겨 왔는데 내년 상반기엔 이 매장이 아예 없어지니 생계가 막막하다"고 했다.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최근 대거 채용된 조선족 직원들도 걱정이 태산이다. 월드타워점의 인삼 제품 판촉사원 이모(30)씨는 "지난해 결혼해 서울 대림동에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신혼집을 꾸몄는데 실직하면 큰일"이라고 했다.

◇"직원 중 소수만 재취업할 듯"

지난달 면세점 사업권을 따낸 신세계와 두산은 "가급적 탈락한 기존 면세점 직원을 고용한다"는 입장이지만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당초 "기존 인력을 100% 승계하겠다"고 했던 신세계는 최근 인원 전체 인수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산은 그룹 전체가 감원(減員)을 벌이는 관계로 신규 채용 인원은 소수에 국한할 것으로 전해졌다.

면세점 시장이 성장해 인력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에 대해 현장에선 "현실을 모르는 얘기"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2013년 롯데면세점이 부산 김해공항 면세점 사업권 입찰에서 실패한 뒤 390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이 중 3분의 2 수준인 250여명은 아직 실직 상태로 파악됐다.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해소하는 근본 해법으로 '5년 한시법 개정'을 꼽는다. 정부가 면세점 기업을 상대로 고용 대책을 요청할 수 있지만 실효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정재완 한남대 무역학과 교수는 "정치 논리로 만든 법이 근로자들의 고용 안정과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며 "5년 한시법 자체를 하루빨리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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