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불평등의 경제학]부러진 계층 이동 사다리

2014. 7. 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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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세습 고착화되며 불평등도 덩달아 심해져 저소득층, 중산층·상위층으로 올라갈 확률 하락

서울 시내 모 사립대 교수 A씨(52)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항상 끼니를 걱정해야 했지만 A씨는 희망이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중에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부잣집 자녀들이 받는다는 과외는 꿈도 꿔 본 적이 없다. 밤늦도록 어두운 방에서 혼자 책과 씨름했다. 대학 본고사 준비도 혼자 했다. 그러고도 A씨는 당당히 서울대에 합격했다. 이후에도 경제 여건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A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서울 모 사립대 교수가 됐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빚진 돈은 교수 월급으로 갚아나갔다. 그렇게 20여년을 지내면서 A씨는 빚도 다 청산하고 내집마련에도 성공했다.

A씨는 "그 시절엔 돈이 없어도, 집안이 좋지 않아도 공부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었다. 동료 교수들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점점 더 나 같은 사람은 성공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다. 1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교수는 꿈도 못 꿨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저소득층의 빈곤 탈출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8년간 저소득층이 중산층이나 고소득층으로 올라간 확률은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2005~2006년 31.7%던 이 비율은 2011~2012년 23.5%까지 떨어졌다.

계층 간 이동성 단절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사회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집단 내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소득 불평등이 심하지만 계층 간 상향 이동의 길이 열려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믿음이 있어 용인되는 측면이 있다. 계층 간 상향 이동의 길이 막혀 있다고 생각되면 불평등 문제는 더 큰 사회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교육 기회의 박탈은 계층 간 이동의 단절을 심화시켰다. 지난해 서울대 정시 합격자들의 출신 지역을 봐도 정시 합격자 중 강북구, 구로구, 금천구, 성동구, 은평구 출신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부유층이 많이 사는 서울 강남권 출신 학생들은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 2011년 강남, 서초, 송파구 학생은 전체 정시 합격자(일반고 기준)의 54.3%였으나 지난해 70.1%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수시 합격자도 같은 기간 25.3%에서 40%로 늘었다. 부모 경제력이 대학 입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종석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교육을 양산하는 현 입시제도로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설 데가 없다. 공교육 시스템을 과거와 같이 경쟁적으로 바꿔 저소득층의 똑똑한 아이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계층 간 이동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학전문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등 전문대학원이 늘어나는 것도 부유층과 저소득층이 섞일 수 있는 공간을 없애는 데 일조했다. 이들 전문대학원은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취지를 내세우면서 비싼 등록금을 받는다. 지난해 전국 25개 로스쿨 연간 등록금은 평균 1500만원을 넘었다. 저소득층 자녀들이 선뜻 진학하기에는 부담되는 금액이다. 신동균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문대학원식 교육은 계층 간 이동성을 위축시킨다. 전문대학원의 근본 취지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저소득층의 진입을 가로막는 것만은 분명하다. 저소득층에게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교육 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시장 양극화도 계층 간 이동의 단절을 불러온 이유다. 우리나라는 특히 비정규직 비중이 높아 계층 간 이동성을 더 악화시켰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전체 근로자 1824만명 중 837만명(46.1%)이 비정규직이다. 근로자 2명 중 1명은 비정규직인 셈이다. 게다가 이들 직업이 대체로 서비스업에 편중돼 있는 것도 문제다.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서비스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 이들을 재교육하지 않는 이상 소득 불평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허창수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노동 시장이 고소득 직업과 저소득 직업으로 양극화하고 있다. 고소득 직장은 소수정예 원칙을 따르고 나머지는 모두 저소득 직장이다. 미국에서도 최근 만들어지는 직업의 70%가 호텔, 식당, 편의점 등 서비스업에 속하는 직업"이라면서 "계층 이동 단절 현상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월급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집값과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세율도 계층 간 이동의 단절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신동균 교수는 "부모 도움 없이도 자기 노력에 의해 중산층 정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근로소득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임금을 무작정 올릴 수 없기 때문에 근로 동기를 고취시키고, 부동산 가격을 하향 안정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재설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부의 세습이다. 부의 세습은 계층 간 소득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 세대에 계속 이전되면 저소득층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기 때문이다.

부모 경제력이 대학입시에 결정적 노동시장 양극화로 계층 이동성 ↓ 단절 우려 수준 아니란 의견도

한국의 세대 간 소득 이동성을 추정한 양정승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박사는 "미국의 경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대 간 소득 이동성은 0.8을 웃돌았지만 1990년대 초반 0.6까지 떨어졌다. 국내 또한 소득 이동성이 점차 후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교육의 사다리 역할이 예전만 못하다"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부의 세습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 양정승 박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세대 간 소득 이동성은 0.6~0.7가량. 이 정도 수치면 미국과 유사하고, 서구 유럽보다는 낮다. 세대 간 소득 이동성은 0과 1 사이 값으로 1에 가까울수록 이동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정승 박사는 "소득 분산도가 동일한 두 사회가 있다 해도 부모 세대 소득이 자녀 세대로 이전되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형평성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부모 세대 소득이 자녀 세대로 연결되지 않는 사회가 더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계층 간 이동성 단절을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은 "매년 중산층에서 하층과 상층으로 이동하는 계층은 10~20% 수준이다. 이를 단절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교육이 되레 계층 이동 가로막는 기제로 작용

천정부지 사교육비에 저소득층 지레 포기

저소득층이 계층 상승을 하기 위해 기댈 곳은 교육뿐이다. 하지만 최근의 한국처럼 사교육 시장이 힘을 발휘할수록 저소득층이 빈곤층을 벗어날 힘은 약해진다.

사교육비 지출액을 단순 비교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소득 하위 1분위 계층의 자녀 1인당 월 교육비 지출은 11만4275원. 5분위 계층은 41만5370원으로 1분위 계층의 4배가량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교육을 단순히 입시 열풍으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아교육, 초등교육, 고등교육, 대학, 최근엔 전문대학원까지 사교육이 판을 친다.

4세 정도부터 정규반을 모집하는 영어유치원의 한 달 교육비는 최소 65만원에서 최고 200만원을 호가한다. 저소득층에겐 소위 '넘을 수 없는 벽(넘사벽)'이다. 경기도에서 초등학교 계약직 영어교사로 일하며 6살, 7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B씨는 얼마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두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려면 매달 250만원 가까이 든다. 직장 월급이 고스란히 아이들 유치원비로 들어가니 차라리 일을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영어, 수학은 기본에 논술, 과학 붙여주고 그림과 악기 하나 정도 기본으로 하려면 '자녀 1인당 월 사교육비 150만~200만원'은 우습다. 중학교에선 외고, 과학고, 자사고 등 특목고를 보내기 위해 다시 사교육의 바다에 풍덩 빠져야 한다. 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되면서 이제 돈이 없으면 변호사, 의사는 꿈도 꾸기 어렵게 됐다. 거액의 투자비를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전문대학원도 사교육의 연장선이 됐다.

[김헌주 기자 dongan@mk.co.kr, 서은내 기자 thanku@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64호(07.02~07.08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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