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 삼겹살 먹으면서 '너구리'는 회수하는 나라

김민철 기자 2012. 10. 31.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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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가 삼겹살보다 벤조피렌 1만6000배 낮아.. 무해하다고 해놓고 입장 바꾼 식약청

지난 24일 국회 보건복지위 국감 현장. 농심 이 일부 라면 수프에 벤조피렌 기준을 초과한 원료를 사용한 것과 관련, 이희성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은 "해당 제품을 검사한 결과 평생 먹어도 인체에 무해한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처음 언론에 공개한 민주통합당 이언주 의원은 "농심이 부적합 원료를 사용한 것은 맞지 않느냐. 왜 제품 수거 등 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고 몰아붙였다. 그러자 이 청장은 "공감한다. 시정조치를 했어야 했다"고 답해버렸다. 식약청은 다음 날인 25일 농심 일부 라면 제품을 자진 회수하라는 조치를 내렸다. 당초 태도를 180도 바꾼 것이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지난 주말부터 29일까지 농심의 '너구리' 제품은 40%, 우동류 매출은 15% 감소했고, 라면 시장 전체 매출도 5% 줄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농심 제품을 수입하는 나라들에도 파문을 일으켰다.

식품에 문제가 있거나 인체에 유해하다면 국제적 리콜까지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식품 전문가들은 "검출량이 인체에 무해한 수준인 데다, 처음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가 태도를 바꾼 것은 식약청이 크게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감에서 한건주의식 폭로와 오락가락하는 식약청의 무소신이 합작한 어이없는 사태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벤조피렌이 세계보건기구(WHO)가 '1급 발암물질'로 규정한 물질이긴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준치 이하일 경우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에 농심 라면 수프 1개에서 0.000005㎍의 벤조피렌이 나왔지만, 우리 국민들이 삼겹살을 구워먹을 때 하루 평균 그 1만6000배인 0.08㎍을 섭취하고 있다. 또 생선구이에도 0.1~0.3㎍, 참기름 등에도 0.08㎍ 들어 있고, 담배 연기, 자동차 배기가스 등에도 있다. 고려대 이광원 교수(식품공학부)는 "벤조피렌은 굽고 튀기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겨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밖에 없다"며 "60kg 성인 기준으로, 하루에 0.24~0.78㎍ 정도를 섭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이형주 교수(식품생명공학)는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이나 된장국에도 미량이나마 유해 물질이 들어 있을 수 있다"며 "그러나 기준치 이하일 경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섭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화여대 오상석 교수(식품공학과)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작은 양이라도 유해 물질이 들어 있다고 하면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론적으로 100% 안전한 식품은 없다"며 "그래서 과학적인 기준을 정해 그 기준 이하이면 평생 섭취해도 좋다고 하는 것인데, 식약청은 스스로 일관성을 버린 것"이라고 했다. 한양여대 신성균 교수(식품영양학과)는 "농심도 억울해할 입장만은 아니다"며 "위험하지는 않더라도 불량 원료를 사용한 도의적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자진회수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한편 29일 식품 분야 교수 모임인 한국식품안전연구원에 이어, 30일 식품 분야 전문가 모임인 한국식품위생안전성학회도 "식약청이 국회 등 비전문기관의 비난에 과학적인 재검토 과정 없이 일부 라면 제품을 회수해 사회적 비용과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벤조피렌(Benzopyrene)

물질을 불에 가열하거나 태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환경호르몬. 구운 고기의 검게 탄 부분, 참기름, 담배 연기, 자동차 배기가스 등에 들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급 발암물질'로 규정하고 있지만, 기준치 미만으로 노출될 경우에는 문제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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