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시장 4계급 있는데"..64세 청년의 구직일기 보니

권민철 2012. 3. 28.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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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로 듣는 일과 삶②] 60대 실업일기

[CBS 권민철 기자]

일자리 문제가 갈수록 예사롭지 않다. 20~30대의 청년실업 문제 뿐 아니라 사회노령화로 인한 65세 이상 고령자의 일자리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 여기에 해고와 조기퇴직 앞에 떨고 있는 40대, 정년 단축에 무방비로 당하는 50대까지 일(work) 문제에서 자유로운 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노컷뉴스는 20대부터 70대까지 각 연령대 노동자와 하루를 보내며 그들의 '일과 삶'을 들여다봤다. 이 기사는 CBS가 아침종합뉴스(7:30~8:00)에서 27일부터 방송중인 '라디오로 듣는 일과 삶'을 노동자의 일기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편집자 주]

오늘도 두 탕을 뛰었다. 먼저 친구가 일하고 있는 파주 운정신도시 아파트 공사 현장에 갔다. 그 쪽에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나의 말에 친구는 오지 말라고 했었다. 3개월째 일을 못하고 집에만 있다 보니 목도 타고 머리도 아팠다.

불쑥 찾아간 아파트 현장에서 친구는 안전시설물을 설치하고 있었다. 내가 2004년부터 아파트 공사장에서 해오던 일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옥상에는 조경작업이 한창이었다. 공사가 마무리 돼 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2~3개월이라고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지 친구에게 물어봤다.

그는 대답하기 미안한지 "여기도 사람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고 돌려서 말한다. 그 말의 뜻이 "나이든 사람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인지는 그도 알고 나도 안다. 그는 대신 인근 23블록과 15블록 아파트 공사 현장을 추천해 줬다. 이제 막 기초공사를 하고 있으니 사람을 쓸 거라는 얘기다. 특정 블록의 구체적인 작업 진행 추이는 현장에서만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다.

그가 귀띔해 준 23블록 현장에 달려갔다. 친구가 말한 대로 터파기가 한창이었다. 현장소장을 찾아갔다. 그는 동료와 함께 컴프레셔를 고치고 있었다. 일하고 싶어서 왔다는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겨우 그의 전화번호만 딸 수 있었다. '일 잘하는지 좀 보자'는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허사로 끝났다.

나오면서 나중을 위해 내 이름 석 자를 그의 귀에 두어 번 새겨 넣었다. 그러나 나이조차 묻지 않은 걸 보면 이곳도 틀린 것 같다. 누가 저 사람에게 빽을 써 주면 좋을 텐데... 오늘따라 부질없는 생각까지 든다.

마음이 울적해서 친구가 이야기해 준 15 블록은 포기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에 있는 아내에게서 빨리 와달라는 전화가 왔던 터였다. 몸이 성하지 않은 아내를 위해서도 일을 해야 하지만 나이가 웬수다.

내 나이 64살. 최근 집에서 놀면서 세어보니 딱 48년을 일했다.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나는 유리공장에 취직해 30여년간 일했다. 그 위 정말 안해 본 일이 없다. 자동차 오토바이 정비소, 장어집, 기원, 홍탁집을 했었고, 목수, 이삿짐센터 직원도 해봤다. 일본에서 운전수로도 일해 봤고 보따리장수, 경비로도 일했다.

그러다 2004년부터 한 친구의 권유로 건설현장에서 '안전'일을 하게 됐다. 직전에 경비하면서 받은 70만원보다 배 정도 많은 월급에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나이 60이 넘으면서 일자리 구하기가 눈치 보이는 일이 됐다. 사실 나이로만 보면 은퇴할 때가 된 건 맞다. 그러나 내가 일하지 않고는 가정을 꾸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몸도 고장난 데 없어서 앞으로 70까지는 일할 자신도 있다.

['라디오로 듣는 일과 삶' 다시듣기][AOD1]

50년 가까이 일하며 돈을 벌었지만 몇 차례의 사업 실패와 바람직하지 못했던 돈놀이 결과 지금 아파트 전세값 8,600만원이 전 재산이다. 그런데 최근 집주인이 1억 2천만원에 집을 내놨다. 작년에 임대 아파트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눈앞이 캄캄해진다. 임대 아파트 역시 월세와 관리비 등을 포함해 매달 20만원은 넘게 지출해야한다고 한다. 내가 쓰는 용돈도 한 달에 50만원씩은 나간다.

게다가 현재 학원 강사로 뛰는 아들도 장가를 보내야 한다. 그 녀석은 자기 돈 벌어 학자금 융자 갚기도 빠듯해 한다. 남들은 연금 이야기를 하지만 내가 연금으로 받는 돈은 매달 18만원이 전부다. 담배 사피면 딱 맞는 돈이다.

다음 달 예정된 청소원 면접도 틀어지는 분위기다. 나이 때문이란다. 이제는 나이라고 속여야 하나? 사실 동생의 신분증으로 자기 나이를 속이며 건설현장에 취직하는 사람들을 가끔씩 봐왔다. 나이 먹고 오히려 인생이 구차해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인력시장에서도 찬밥 신세가 된지 오래됐다. 그 곳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 1순위는 젊고 차있는 사람, 2순위는 젊고 차없는 사람, 3순위는 늙고 차있는 사람, 4순위는 늙고 차없는 사람으로 명확히 구분돼 있다.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난다.

나이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실제로 작업현장에서 보면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대개 젊은이들이다. 이거야 말로 정부가 움직여야 할 일이다. 나이 먹어서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죽을 때 까지 일해도 좋으니 내게 일자리를 줬으면 좋겠다.twinpine@cbs.co.kr

청소·폐지수집 '투잡'에 나선 김 할머니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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