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과 범고래는 폐경이 있는가

이영완 기자 2012. 9. 18.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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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고래 폐경은 '마마보이 아들' 탓 - 어미 죽으면 수컷 사망률 14배 증가, 다 큰 아들 보살피려고 생식 멈춰 여성 폐경은 할머니·시어머니 역할 때문? - 위험한 노산보다 손자·손녀 돌보는 게 자신의 유전자 확산에 유리하다 판단 "며느리와 생식 경쟁 피하기 위한 것".. '고부갈등설'도 최근에 주목 받아

동물 세계에서 대부분의 암컷은 죽을 때까지 연이어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수명이 한참 남았는데도 생식능력을 잃는 폐경(閉經) 현상은 사람과 범고래(killer whale), 들쇠고래(pilot whale) 등 3종에서만 발견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도 폐경이 없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생물의 기본 목적이 가능한 대로 많이 자손을 퍼뜨리는 일인데 왜 사람과 고래만 유독 섭리에서 벗어난 것일까.

◇범고래 폐경은 마마보이 기질 때문

범고래는 몸길이 5~7m에 몸무게가 4~5t이나 된다. 어미를 중심으로 아들·딸들이 함께 사는 모계사회를 이루며 바다사자, 심지어 다른 고래 새끼도 사냥한다. 범고래 암컷은 90세까지 살지만 보통 30~40대 젊은 나이에 생식을 멈춘다.

영국 엑시터대의 다렌 크로프트(Croft) 교수 연구진은 1974년부터 2010년까지 36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 서부해안에 사는 범고래 589마리를 관찰했다. 연구진은 폐경 원인을 찾는 연구에서 의외를 결과를 얻었다. 무시무시한 영어 이름과 달리 범고래 수컷은 어미 없이는 살 수 없는 '마마보이'(mommy's boy)였던 것.

범고래는 등지느러미를 보면 나이와 성별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지문인 셈이다. 연구진은 이를 토대로 보험회사가 생명보험료를 계산할 때 쓰는 알고리즘을 적용해 만약 어미가 없다면 범고래의 생존율이 어떻게 되는지 계산했다. 그 결과 어미가 죽은 다음 해에 30세 이상 수컷의 사망률이 14배나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나이 암컷 사망률은 3배 증가에 그쳤다. 연구진은 지난 14일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범고래 암컷이 생식을 멈추고 나서도 오랫동안 사는 이유는 다 큰 아들을 보살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범고래 어미는 왜 아들만 편애하는 것일까. 연구진은 범고래 가족의 특성에서 답을 찾았다. 범고래 수컷은 짝짓기 때가 되면 다른 집단으로 가서 짝을 찾는다. 새끼가 태어나면 잠시 머물다가 다시 어미에게 돌아온다. 반면 암컷은 원래 집단 안에 있다가 다른 집단에서 찾아온 수컷과 짝짓기한다. 범고래 어미로선 다른 집단에서 새끼를 낳는 아들을 돕는 편이 에너지를 덜 들이면서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는 길이 된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인간의 폐경은 고부(姑婦) 갈등 탓?

사람은 좀 더 복잡하다. 폐경을 두고 크게 세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는 '어머니 가설'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자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노산(老産)은 자칫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 결국 일찍 폐경을 맞아 이미 낳은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둘째는 영국 셰필드대의 비르피 루마(Lummaa) 교수가 2004년 발표한 '할머니 가설'. 위험한 노산을 하는 것보다 손자·손녀가 잘 자라도록 돌보는 것이 결국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퍼뜨리는 데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이른바 '고부 갈등설'이다. 2008년 영국 엑시터대의 마이클 칸트(Cant) 박사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여성의 조기 폐경은 외부에서 온 며느리라는 새로운 젊은 여성과 생식 경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동물은 짝짓기할 때가 되면 수컷이 집단을 떠난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는 딸이 떠나고 대신 며느리가 가족으로 들어온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동시에 아기를 낳으면 음식이나 보살필 시간과 같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며느리로선 유전자가 다른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할 이유가 없다. 결국 시어머니는 유전자를 나눈 아들이 며느리를 통해 자식을 낳을 수 있게 폐경으로 양보했다는 설명이다.

지난달 핀란드 투르쿠대의 미르카 라덴페라(Lahdenpera) 교수 연구진은 '고부 갈등설'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에콜로지 레터스(Ecology Letters)'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산업화 이전인 1702~1908년 핀란드 루터교회에 보관된 출생·결혼·사망 기록을 분석했다. 여기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으면 시어머니의 늦둥이가 15세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50% 떨어지고, 며느리가 낳은 아기는 66%나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시어머니가 계속 출산을 고집하면 후손을 퍼뜨릴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말이다.

이 연구도 한계가 있다. 산업화 이전 시대라고는 하지만 불과 200여년의 시간이 폐경의 진화를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또 인간은 당시 핀란드와 같은 농경사회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전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할 때부터 가족을 이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은 한 가설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상황이다. 학계에서는 여성이 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자신을 희생해 인류를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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