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에게서 찾은 승자의 언어

정보철 창업 컬럼니스트 2009. 8. 1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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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정보철창업 컬럼니스트][[창업칼럼] 역사에서 배우는 승자의 언어]"나는 수도를 하는 도승이오. 내게 있어 여인은 사마외도요. 냉큼 물러가시오."젊은 처자는 물러날 수밖에 없다. 젊은 처자를 심부름 보낸 노파는 기가 막혔다. 그날 밤 당장 암자를 불태워버렸다.

"내가 20년 동안 엉뚱한 놈을 공양했구나."노파는 불같이 화를 냈다. 수행에는 철저하면서도 한점의 자비심을 익히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20년 이상 수행한 수좌가 아직 본성을 억누르는 계율에 묶여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욱한 짓이었다.

노파의 분노가 화두로 변모했다. 수행이 우선인가, 자비가 먼저인가? 조선의 명기 황진이의 일화에서 그 해법을 찾아보자.

"송도에는 삼절이 있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박연폭포와 서화담 그리고 소인입니다."오연(傲然)하다. 누가 어디 감히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용에 시비를 따질 생각은 없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것은 황진이 개인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시비를 붙여 마땅하다. 지족선사의 문제다. 당시 생불(生佛)로 평가받던 지족선사가 그만 '팽' 당했다. 낙인은 파계였다. 단 한번의 외도로 30년 염불이 하룻밤사이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간 지족선사는 '땡중'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황진이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인식해야할 것이 있다. 삶은 축제의 장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축제에 초대된 존재들이다. 축제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왜 태어났느냐? 제발 고행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당신 지성의 허약함만 드러낼 뿐이다.

축제의 장에 왔으면 놀이에 참여해야 한다. 한바탕 떠들썩하게 뛰놀다 갈 일이다. 굳은 얼굴로 축제의 한편에 머물다 갈 생각은 아예 하지마라. 축제를 망치는 짓이다.

축제의 놀이 중 강력한 것은 유혹이다. 열정의 한 형태인 유혹은 즐거운 놀이다. 유혹하는 것도 유혹을 받는 것도 놀이의 한 형태다. 유혹으로 인해 삶은 팽팽하게 긴장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바다위로 솟구쳐 오르는 물고기처럼 삶은 진한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유혹에서 중요한 것은 유혹하는 것보다 유혹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 태도에 따라 유혹이 즐거운 놀이가 될 수도 있고, 추악한 추문으로 끝날 수도 있다.

유혹은 인간 맺기의 생생한 수단이다. 유혹으로 인간 맺기가 시작되고 유혹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맺기가 완성된다.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은 유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행동이다.

황진이는 조선의 팜므파탈이다. 그 치명적 유혹을 거부한 것은 서화담이다. 그리고 그 도발적 유혹을 받아들인 것은 지족선사다. 그 결과 유혹을 축제의 일환으로 파악한 지족선사는 서화담과 반대로 일순간에 '못된 놈'으로 변했다.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서화담은 과연 추앙받을 만한 인물일까. 그는 유혹의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했다. 자신이 설정한 좁은 울타리에서 머물다 간 사람일 뿐이었다. 자신의 한계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혹자는 그것을 높게 평가할 수도 있다. 여하튼 그는 삶이 얼마나 큰 축제의 장인지 몰랐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메마른 지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메마른 지식은 불임(不姙)이다. 탄생의 기쁨을 모른다. 탄생을 모르니 유혹이라는 열정을 알 리 없다.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인간은 추하다. 삶은 함께 어울려야 진정한 맛이 난다. 유혹을 받아들여 한바탕 웃고 지나갈 일이었다. 축제마당에 왔으면 축제를 즐겨야지, 축제를 거부하는 것은 무슨 놈의 작태란 말인가.

그는 냉정한 눈을 가졌다. 냉정한 눈은 삶의 전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차가운 면만 안다. 그래서 삶이 뜨거운 열정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자신밖에 몰랐다. 자신에 파묻혀 삶이라는 전체의 장을 잃어버렸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은 허약하다. 삶이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자신이라는 부분을 바라보아야 하거늘 자신이라는 부분에 함몰되고 말았다. 축제의 장이라는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수행이라는 부분에만 몰두했다. 부분에 몰두하는 것은 극단적이다. 극단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미성숙이다.

서화담은 황진이를 품어야 마땅했다. 유혹에 넘어갔어야 했다. 축제의 마당에서 유혹이라는 놀이에 흠뻑 취했어야 했다. 유혹을 하고 당하면서 삶을 한바탕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체를 보는 것이다. 흥겨운 삶을 즐기는 태도다. 전향적인 자세다.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 인생이든 사업이든 전쟁이든 예술이든 모두 같은 원리다.

전체를 본다는 것은 한편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도 부분은 의미가 없다. 세계적인 명화를 보라. 추상화의 창시자인 칸딘스키,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 광기어린 작가 고흐의 그림이든 부분으로 쪼개면 전혀 무가치하게 된다. 무엇을 의도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전체와의 고려가 없는 부분은 몰가치하다. 역사에서도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의 함수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인상여가 그러한 인물이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에는 인상여라는 재상과 염파라는 장군이 있었다. 인상여가 화씨지벽(和氏之璧)사건으로 벼락출세를 하자 염파가 발끈했다. 염파는 인상여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도가 지나친 염파였다. 소위 군대에서 소장이 대장에게 벼른 꼴이다.

어느 날 외출을 하다가 염파가 탄 수레와 마주쳤다. 인상여는 자기 수레를 골목길에 비켜 세우고 염파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인상여의 이런 행동은 손가락질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식객들마저 말이 많았다.

이에 인상여가 말했다. 먼저 자신이 큰 나라인 진나라 임금에게도 큰소리를 쳤던 사람임을 상기시켰다.

"막강한 진나라를 욕보인 사람인데 유독 염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진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염파와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염파와 싸운다면 서로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진나라에게 이익이 된다.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염파를 피한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나중 문제다."

나중에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된 염파가 회초리를 한짐 가득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갔다. 인상여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그리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로를 배신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이 일화는 문경지교(刎頸之交 ; 서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막역한 사이), 선공후사(先公後私 ; 공적인 일이 우선이고 사적인 일은 나중에),부형청죄(負荊請罪 ; 가시나무를 지고 죄를 청함) 등의 다양한 고사의 배경이 되었다.

인상여와 염파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상여는 전체에서 부분을 파악한 것이고, 염파는 부분에 국한했다. 전체의 맥락에서 사건을 파악한 인상여의 지혜가 진나라의 침입을 막았다. 인상여가 검은 칠판에 하얀 백묵으로 글씨를 썼다면 염파는 하얀 칠판에 하얀 백묵으로 글씨를 쓴 격이다. 그 차이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만큼 크다.

리더는 전체를 보아야 한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리더는 일을 파국으로 이끈다. 전체는 승자의 언어요, 부분은 패자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서두에 나왔던 일화는 고목선(枯木禪)이란 화두로 발전했다. 선은 선이되 감각이 살아있는 선이 아니라 마른 나무처럼 메마르고 죽어 있는 선을 가리켜서 고목선이라 부른다. 고목선의 주인공은 철오선사다. 그는 쫓겨나오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또 하나의 화두를 일으켰다."어떻게 하면 암자에서도 쫓겨나지 않고 노파도 실망시키지 않는단 말인가"이런 생각으로 다시 20년을 보냈다. 어느덧 나이 60여세가 되었을 때 갑자기 한 생각이 터졌다.

'불성은 선과 악이 없고, 남녀도 없다.길고 짧음이 없고, 더럽고 깨끗함이 없다….'철오선사에게 부분은 사라졌다. 삶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자신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났다. 수행이라는 부분에서 삶이라는 전체 무대로 자리이동을 했다. 그는 20년의 수행과 그리고 20년의 고행 끝에 축제의 장에 당당히 등장했다. 주빈(主賓)으로서 말이다. 선악(善惡), 남녀(男女), 장단(長短), 염정(染淨)이 함께 어우러진 축제의 장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 철오선사로 거듭 태어났다.

철오선사의 깨달음으로 인해 노파의 분노는 자연스레 사그라졌다. 온데 간데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아직도 자비가 먼저냐, 수행이 우선이냐를 따질 것인가. 꼭 집어 얘기하자면 자비는 전체이고 수행은 부분이다. 따라서 전체는 승자의 언어요, 부분은 패자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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