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민의 시시각각] 11,134,000,000,000,000원의 불편함

정경민 입력 2015. 8. 31. 00:08 수정 2015. 12. 1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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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br>경제부장

‘11,134,000,000,000,000원(1경1134조원)’. 올 상반기 증시 관련 자금 규모다. 파생상품 시장엔 이미 경 단위 통계가 수두룩하다. 장내 파생상품 거래대금은 지난해 4경원을 넘겼다. 지난해 한국은행 금융망을 이용한 원화 이체도 6경원을 돌파했다. 1경원 밑엔 0이 무려 16개나 붙는다. 1만원짜리 지폐로 1경원을 바닥에 깔면 대한민국을 한 번 덮고도 남는다. 1경원을 영어로 옮기자면 미국인도 잘 모르는 10‘쿼드릴리언(quadrillion)’이란 생경한 단어를 써야 한다.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1위 국가의 화폐단위치곤 군색하기 짝이 없다. 경제 규모가 훨씬 작은 태국의 바트화도 1바트에 33원이다. 1달러 바꾸는 데 네 자릿수 환율을 쓰는 나라는 몽골 정도뿐이다. 1000원을 10원이나 1원으로 바꾸는 식의 화폐단위 조정인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논의를 다시 꺼내는 이유다.

 이미 시중에선 자연스럽게 리디노미네이션이 확산되고 있다. 외국인이 많은 서울 이태원은 물론 강남이나 대학가 커피점에선 1만원을 ‘10.0’으로, 5000원은 ‘5.0’으로 표시한 가격표가 낯설지 않다. 노무현 정부 시절 당시 한국은행 박승 총재가 리디노미네이션을 주창하고 나선 적이 있다. 한은 내부적으론 실무 검토까지 마쳤다. 그러나 당시엔 부동산 투기 광풍이 발목을 잡았다. 아파트값과 사투(死鬪)를 벌이던 마당에 리디노미네이션 카드를 잘못 뺐다간 불난 집에 휘발유 끼얹는 우를 범할 수 있었다. 1000대 1로 단위를 줄이면 3억9000만원짜리 집은 39만원이 된다. 갑자기 싸 보이니 집값은 자연스럽게 40만원으로 뛰기 십상이다. 600원짜리 과자도 0.6원이 아니라 1원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당시와 정반대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8개월째 0%대로 바닥을 기고 있다. 연초 담뱃값 인상효과를 빼면 사실상 마이너스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 동안 깨어나지 못한 디플레이션 악몽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집값이 오르긴 했어도 2000년대 중반처럼 투기 열풍을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디플레이션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이 구원투수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현금자동입출금기(ATM)나 전산시스템 교체 수요가 새로 생긴다. 풀 죽은 내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강장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부수효과도 따른다. 새 화폐와 바꾸자면 장롱이나 침대 밑에 숨겨 둔 구권을 은행에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로선 짭짤한 세수 증대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수 확대를 노린 리디노미네이션은 자칫 독배(毒盃)가 될 위험성도 안고 있다. 1962년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시작한 박정희 정부가 세수 확대를 겨냥해 단행한 제2차 화폐개혁이 대표적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구권 10‘환(<571C>)’을 신권 1‘원’으로 교환해 주되 일정액 이상은 산업개발공사 주식으로 주겠다고 발표했다. 지하자금을 강제로 갹출해 경제개발자금으로 쓰자는 심산이었다. 그러자 시중엔 돈이 말랐고 소비는 꽁꽁 얼어붙었다. 이로 인해 기업이 줄도산 위기에 처하자 한 달 만에 정부가 항복했다. 세수 증대는커녕 경제에 깊은 상처만 남긴 채 정부 체면만 구겼다.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불거질 때마다 나오는 경제 혼란 우려도 당시 트라우마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젠 버스요금도 신용카드로 내는 세상이 됐다. 금융거래도 62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투명해졌다. 정부가 세수란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지 않는다면 충격은 최소화할 수 있다. 유로존 19개국도 99년부터 차례로 기존 통화 대신 유로화를 새 화폐로 바꿔 써 왔지만 큰 혼란을 겪지 않았다. 내년 총선거와 내후년 대통령선거가 부담스럽다면 지금부터 공론화라도 시작한 뒤 다음 정부가 단행해도 늦지 않다. 경 단위 통계가 쏟아지고 있는 현실을 마냥 수수방관할 순 없지 않은가. 언젠간 가야 할 길이라면 순풍이 불 때 돛을 올리는 게 순리 아닐까.

정경민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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