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1000조 대 1000조 / 최우성

2015. 8. 2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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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업 조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글로벌 기업들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하나의 현상에 주목한다.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똑같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조업' 분야의 기업 내부에 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조직)의 규모가 부쩍 확대된 것이다. 자금을 조달하고 운용하며 수익을 전략적으로 통제·관리하는 '기업금융'이라는 분야가 등장했다.

이런 현상은 전통적인 기업 운영 원리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음을 일깨워준다. 단순하게 말해 기업이란 제 주머니 돈이나 남에게서 빌린 돈을 종잣돈 삼아 사람과 기계를 사 물건을 만든 뒤 이를 내다팔아 이윤을 남기는 조직이다. 중간 단계가 생략된 채 돈이 곧장 돈을 버는 금융업은 전혀 다른 경우다. 말하자면 자본의 가치실현 방식이 생산적 형태와 금융적 형태로 나뉘는 것인데, 역사적으로 이 둘은 뚜렷하게 구분돼 왔다. 앞서 말한 새로운 현상이란, 이제 둘 사이의 구분이 사실상 허물어지고 있다는 뜻과 같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를 두고 '금융회사'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수익이 모두 물건을 내다팔아 생긴 건 아니다. 금융자산 운용 수익도 꽤 있다. 지난 6월말 현재 삼성전자의 자산 164조 가운데 현금을 포함해 여러 형태의 금융자산만 31조나 된다. 이처럼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의 전체 수익 창출 과정에서 '금융적' 기능은 눈에 띄게 확대됐고, 금융 활동으로 인한 수익 비중도 증가하는 추세다. 여러 나라에서 공통된 현상이다.

결과는? 생산적 투자의 '구축효과'는 여러 연구에서 일관되게 도달하는 결론이다. 기업이란 기대수익률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인데, 다른 방식으로도 기대수익률을 충족할 수 있다면 굳이 사람과 기계에 돈을 쓰는 생산적 투자에만 매달릴 이유가 없는 노릇이다. 나아가 기업경영의 시야가 짧아지고(단기화) 위험회피 경향이 커지는 건 물론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인류사회가 쟁취한 여러 '권리'는 슬그머니 '특권'으로 개명당한다. 연대는 세대, 정규직-비정규직, 원청-하청 간 갈라치기에 밀려난다.

1000조 대 1000조.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숫자다. 한편엔 1000조가 넘는 가계부채에 짓눌린 개인들이, 다른 한편엔 1000조의 사내유보금을 쥔 기업들이 있다. 30대 재벌 계열사의 사내유보금(710조)은 어림잡아 올해 정부 예산(375조)의 두 배 규모다. 이러다 보니 '모든 건 기업들이 돈만 쌓아두고 투자를 하지 않는 탓'이란 생각이 온 사회를 지배한다. 때마침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 목소리도 높다. 재벌 사내유보금을 환수해 이 가운데 176조만 투입하더라도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정규직화, 청년실업 해소라는 3가지 숙제를 모두 풀 수 있다는 논리다.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들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며 죄지은 기업인을 사면하고 규제의 빗장을 활짝 풀어주는 등 선물을 안기느라 여념이 없다. 일종의 '투자대망론'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이미 국내 주요기업들의 '투자재원자립도'는 200%를 넘어섰다. 쓸 수 있는 재원 가운데 채 절반도 투자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투자 부진의 이유를 단지 경기가 나쁘다거나 규제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근거다. 올해 3월말 현재 10대 재벌이 보유한 금융자산만 260조. 규모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쯤 되면 굳이 (생산적)투자에 나설 이유가 많지 않다. 백번 양보해, 세상을 바꿔온 건 자본결핍의 시대와 맞선 기업가 정신이라 치자. 자본과잉의 정반대 세상. 금융자본주의 질서는 모험을 감수할 배짱도, 신산업을 일굴 능력도 없는 기업에는 손쉬운 유혹이자 훌륭한 도피처다, 사회 전체로 봐선 반드시 풀어야 할 족쇄일 테고.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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