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게임 '문명 기획자' 시드마이어

입력 2010. 10. 25. 11:54 수정 2010. 10. 2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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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저널 버즈] "게임 크리에이터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재미있는 직업이에요. 그래서 저는 세계 최고의 행운아죠."

시드 마이어는 블랙앤화이트(Black and White) 시리즈의 피터 몰리뉴 그리고 울티마(Ultima) 시리즈의 리차드 게리엇과 함께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다른 크리에이터와는 다른 면이 있다.

그는 게임 역사에 획을 긋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여 천재라는 격찬을 듣는 크리에이터가 아니다. 또한 게임 역사상 최다 판매량을 기록하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크리에이터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명예의 전당은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거나 게임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게임을 만든 사람의 전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가 명예롭게 생각하는 모든 상을 다 받아왔다. 특히 미국 컴퓨터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게임 크리에이터로는 유일하게 헌액이 될 정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게임 크리에이터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식어는 사상 최초, 혹은 사상 최대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수식어는 포장하고 꾸며야 하는 언론사에서 쉽게 사용하는 언어적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 전체 게임 산업계를 돌아보면 게임 크리에이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함과 다양함으로 평가해야 한다. 또한 그런 측면에서 보면 시드 마이어야 말로 컴퓨터 게임계의 대부로 손색이 없다.

흔히 반짝 스타라는 말이 있다. 처음 운 좋게 스타가 됐는데 금방 바닥이 드러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스타들을 우리는 쉽게 보아 오지 않았는가? 게임 업계에도 혜성처럼 나타나서 천재소리 들었던 크리에이터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얼마 못 가서 후속작의 실패와 함께 사라지는 크리에이터들을 숱하게 봤다. 그러나 그는 20년째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꾸준함이라는 측면에서 그가 50세가 넘은 현재도 게임 개발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사실 현재 게임 크리에이터로 알려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임 개발일선에서 물러 난지 오래다.

디렉터나 프로듀서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수십 개가 넘는 프로젝트에 조금의 조언을 해주고서는 자신의 이름을 제작자 명단에 당당하게 올려놓고 있다. 단지 세계적인 명성 때문에 그들이 개발에 관여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상 따지고 들어가면 홍보를 위한 얼굴마담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는 정말 다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이다. 실제 그는 게임 개발 일선에서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게임 크리에이터들은 대부분 30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40대가 되면 하향세를 보이며 제작일선에 물러나는 패턴이 있다. 게임은 유행에 민감해서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 기획자들의 최대 소망은 나이 50이 되어서도 게임을 만들고 자녀들과 같이 자신이 만든 게임을 재미있게 플레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망은 꿈같은 얘기에 불과하고 그냥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는 그것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몸소 증명해준 것이다.

다양함이라는 측면에서 시드 마이어를 논하기 시작한다면 이제 그에게 남는 평가는 존경심 그 자체이다. 게임 크리에이터에게는 전문 분야가 있다. 같은 3대 개발자로 평가받는 리차드 게리엇은 울티마라는 롤플레잉 게임만을 개발했고 피터 몰리뉴는 포퓰리스와 블랙앤화이트 같은 갓 게임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하지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 적들을 물리칠 때는 슈팅게임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가 만들면 슈팅게임의 요소가 그대로 갖춰진 상태에서 사실성을 추가하여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승화한다. 해적은 액션 롤플레잉 게임의 장르로 불러도 무방하다. 하지만 해적의 생활자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편하게 그의 게임을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분류해서 그렇지 시드 마이어의 게임들은 모두 복합장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성실함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게임 산업에는 홍보를 위한 과장광고가 판치는 곳이다. 매주 개발 중인 게임 스크린샷을 공개하면서 사상 최고의 그래픽으로 무장된 게임임을 떠들어 대거나 지금까지 없는 획기적인 게임 시스템을 채용했다면서 게임 마니아들을 흥분시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막상 게임이 발매되고 나면 매주 공개했던 그 게임 그래픽은 포토샵으로 조작한 것이 밝혀지고 기대감을 가졌던 게임 시스템은 제작 일정상 어쩔 수없이 삭제가 되었다고 변명을 한다. 이러한 게임계의 현실을 보면 그의 진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그는 게임이 나오기 전까지는 홍보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게임개발에 묵묵히 전념한다. 다른 게임들은 발매 2~3년 전부터 역대 최고 혹은 사상 최초로 포장하며 이제 게임사가 달라질 것이라고 떠드는 것과는 다른 행보이다. 그의 게임은 완성이 되어야 비로소 홍보가 시작된다.

보드게임과 책에 빠졌던 어린 시절시드 마이어는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1954년에 태어났다. 그는 학창시절 책과 보드게임을 특별히 좋아했다는 점을 빼고는 일반 다른 학생과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는 역사, 해적, 비행기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가 문명, 해적, 스트라이크 이글 같은 게임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큰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그가 즐긴 보드 게임으로는 경영을 소재로 한 모노폴리와 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들 이었다. 이러한 보드 게임에 대한 기억은 그가 턴 기반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하는데 고스란히 녹아 있다.

미시건 대학에서 역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그는 제너널 인스트루먼트라는 컴퓨터 회사에 시스템 관리자로 취직한다. 여기에서 그는 편의점이나 상점에 자동화된 계산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종업원들을 교육시켜주거나 보수를 해주는 일을 했다. 물론 밤늦은 시간이면 컴퓨터로 게임을 즐기는 게임마니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게임 개발자가 될 것이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운명적으로 빌 스텔리(Bill Stealy)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게 된다. 둘의 만남은 우연으로 시작됐지만 정말 운명적인 결합이었다. 시드 마이어는 컴퓨터 관련 컨퍼런스에 참가하기 위해서 라스베이거스의 MGM 그랜드 호텔에 가게 된다. 마침 빌 스텔리도 컨퍼런스를 보기 위해 호텔에 도착했다. 컨퍼런스에서는 다른 회사 사람들과의 각종 미팅을 주선했는데 이때 빌 스텔리와 시드 마이어가 만나게 되었다.

빌 스텔리는 미 공군 대령출신의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다. 평소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시드 마이어는 미국 항공 대학을 졸업하고 미 공군 대령으로 펜타곤에서 근무하는 빌 스텔리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이거 저것 물었다. 어느덧 친밀함을 느낀 시드 마이어는 오락실에 비행기를 소재로 한 슈팅게임이 나왔다면서 같이 하자고 제의했다.

평소부터 게임을 즐겼던 시드 마이어는 연전연승하며 경이로운 게임 플레이를 선보였다. 그에 반해 빌 스텔리는 게임에서 계속 졌다. 전투기 조종사로 실전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였던 그는 게임에서 계속 패하자 자존심이 상했다. 옆에서 시드 마이어의 게임 플레이를 지켜보던 빌 스텔리는 어떻게 그렇게 잘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시드 마이어는 적들의 움직임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그 패턴을 예상하면 쉽게 게임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시드 마이어는 빌 스텔리에게 게임의 인공지능이나 여러 컴퓨터 게임 제작 기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시드 마이어의 지식에 감동한 빌 스텔리는 그와 같이 게임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 시드 마이어는 자신에게 2주의 시간만 주어지면 훨씬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단번에 빌 스텔리는 시드 마이어에게 게임회사를 같이 창업하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는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게임이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할 것이라고 봤다. 진짜 직업이 있는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고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빌 스텔리는 2주 넘게 집요하고 끈질기게 시드 마이어를 설득했다. 당신의 실력이라면 게임 하나는 충분히 만들 수 있으니 판매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장담했다.

마침 빌 스텔리는 미국 펜타곤에서 근무하고 미국에서 가장 인정해주는 학위 중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대학 MBA 학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빌 스텔리의 인맥과 마케팅 능력이라면 게임 판매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시드 마이어 본인도 게임 개발에서만큼은 남들에게 뒤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였다.

결국 계속되는 빌 스텔리의 설득에 시드 마이어는 공동창업을 하기로 결정한다. 빌 스텔리는 판매를 전담하고 시드 마이어는 개발을 책임진다는 합의하에 이 둘은 1,500달러를 모아 메릴랜드주의 헌트 밸리에 마이크로프로즈(MicroProse)를 차린다. 이 둘이 회사를 열자마자 처음 한 일은 둘의 우정을 쌓게 해준 비행기 아케이드 게임 '레드바론'을 사무실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플라이트 시뮬레이션 게임의 최고봉이 되다사실 둘은 회사를 막상 차렸지만 자신들의 일에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원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몰래 게임을 개발했던 것이다. 이른바 투잡이었다. 6개월 동안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밤에는 모여 게임을 개발했던 것이다.

개발 중인 게임에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자 게임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그러고 나서야 회사를 그만두고 게임 개발에 전념했다. 2주 만에 레드바론보다 훨씬 좋은 게임을 개발하겠다는 시드 마이어의 장담 한마디로 시작한 마이크로프로즈답게 둘은 창업을 하고 1년 정도 연구기간을 가지더니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스핏파이어에이스(Spitfire Ace)를 시작으로 솔로파이트(Solo Flight), 아크로젯(Acrojet), 스트라이크이글(Strike Eagle)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마이크로프로즈는 전쟁게임 전문회사로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간다.

군사 전문가인 빌 스텔리는 게임 개발에 있어 큰 힘이 되었다. 특히 게임의 사실성을 갖추는데 있어서 최고의 조언자였다. 빌 스텔리의 방대한 군사 전문 지식들은 시드 마이어가 각종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하는데 큰 동기를 마련해주었다.

잠수함을 소재로 한 사일런트서비스(Silent Service), 유럽전쟁을 소재로 한 나토커맨더(NATO Commander)와 크루세이드인유럽(Crusade in Europe)은 실제와 같은 시뮬레이션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1987년 비행기와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을 통해서 제작 노하우를 쌓은 그는 어린 시절의 로망인 해적들의 이야기를 게임으로 개발할 결심을 한다. 하지만 빌 스텔리는 그의 생각에 반대했다. 전쟁과 군사물을 소재로 인기를 얻고 있는 회사에서 뜬금없이 해적을 소재로 게임을 만든다면 사람들이 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는 꼭 해적과 관련된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다. 그러자 빌 스텔리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 동안 시드 마이어가 F-15 스트라이크이글과 같은 게임을 개발해서 유명해졌으니 그의 이름을 표지에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시드 마이어가 만들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 신뢰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판매가 쉬울 것이라는 얘기였다.

처음 시드 마이어는 자신의 이름을 게임 제목에 붙인다는 것이 너무 쑥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해적을 소재로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기 때문에 빌 스텔리의 요청을 이내 승낙한다.

최초로 게임 타이틀에 크리에이터의 이름을 사용하다빌 스텔리의 말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시드마이어의 해적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 이 게임은 회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게임이 되어 돌아왔다. 게임 타이틀에 게임 개발자의 이름을 단 것은 이때가 최초였기 때문에 시드 마이어는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영화를 선택할 때 영화를 만든 감독을 보고 판단하듯 게임도 누가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잣대가 되는 시대를 연 것이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게임회사들은 인력이 유출될까 두려워 개발자들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는 절친한 동업자 빌 스텔리 덕분에 최초로 게임 타이틀에 크리에이터 이름을 써넣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게임 개발에 있어 회사보다는 실제 개발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부각시킨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시드 마이어의 해적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더욱 새롭고 더욱 실험적인 게임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던 차에 심시티(SimCity)의 성공을 지켜본 그는 심시티의 건설에 경영 요소를 삽입할 결심을 한다. 그것이 바로 철도를 소재로 한 레일로드타이쿤이었다.

철도회사를 운영하면서 철도역을 건설하거나 각종 경영, 교역, 주식거래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게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게임이었지만 실제 게임을 하게 되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선사했던 것이다.

게임 역사상 최고의 게임 문명계속 그의 게임이 성공하게 되자 이번엔 더욱 대범한 시도를 하게 된다. 인간 문명의 시작과 발전을 테마로 게임을 개발할 결심을 한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시도였다. 인간 역사와 컴퓨터 기술을 꿰뚫을 수 있는 탁월한 식견이 없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그는 게임 시스템을 세우는 데만 수개월을 흘려보내야 했다. 게임 하나에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어린 시절 즐겼던 보드 게임을 참고하면서 점차 게임의 구색을 맞추어 갈 수 있었다.

문명이라는 테마는 매력적이었지만 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복잡한 문제였다. 아무리 게임이 사실적이라 해도 재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유저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바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와 게임 플레이를 제공해야만 비로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해냈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 플레이어는 그리스나 로마 같은 한 문명의 지도자가 된다. 하나의 문명이 발전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역사적인 지식을 활용해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과학, 외교 별로 신경을 써줘야 한다.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 식견을 쌓을 수 있었다. 이 덕분에 게임의 교육적인 효과가 부각되었고 문명은 게임의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한 게임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됐다.

문명은 시장에 나오자마자 수백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오늘날 그가 세계 최고의 게임 크리에이터로 인정받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재미라는 측면에서도 물론 대단했지만 역사와 철학을 결합시키면서 기존의 게임에 대한 관념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런 측면에서 문명은 심시티와 가장 많이 비교된다.

심시티가 이런 부분에서는 선구자적인 게임이다. 또한 심시티가 아니었다면 문명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시드 마이어가 심시티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명은 심시티에서 발전시킨 게임의 개념을 더욱 확대 발전시킨 게임이다.

심시티가 도시개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문명은 인간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개인의 삶을 모두 담아낸 것이다. 게임의 깊이나 폭에 있어 문명은 심시티를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다. 실제 심시티를 개발한 윌 라이트는 가장 존경하는 게임 기획자로 시드 마이어를 첫손에 뽑는다.

그래서 함께 심골프를 만들기도 했으며 심즈 온라인에서도 특별히 시드 마이어를 초빙해 공동으로 게임을 개발하기도 했다. 심즈 온라인의 경우 게임제작 기술이 외부에 공개된다며 모회사인 EA가 반대했지만 윌 라이트는 특별히 시드 마이어를 게임개발에 참가시켰다.

시드 마이어가 있음으로 해서 자신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시드 마이어가 함께라면 게임의 폭과 깊이가 커져 더 좋은 게임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윌 라이트의 생각이었다.

성공 뒤의 어두운 그림자시드 마이어의 게임 인생은 1991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문명 이전에는 유명한 게임 개발자 정도였지만 문명 이후에는 명실 공히 세계 최고수준의 게임 개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드 마이어는 성공을 보장하는 이름이었고 그의 이름에 걸맞은 여러 게임들을 계속 내놓았다.

하지만 마이크로프로즈의 재정은 날로 어려워졌다. 마이크로프로즈는 갑작스런 성공으로 대규모의 인원을 고용했는데 이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빌 스텔리는 그 책임이 철저하게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게임 재정과 마케팅을 책임지는 자신이 게임 개발의 매력에 너무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마이크로프로즈는 세계최고의 시뮬레이션 게임 회사였다. 1993년 당시 팰콘 시리즈의 성공으로 메이저 회사로 발돋움한 스펙트럼홀로바이트에 인수되면서 마이크로프로즈는 안정적으로 다시 게임개발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합병되면서 회사 규모가 너무 비대해지는 부작용이 생겼다. 시드 마이어는 대규모 인원으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자신의 제작 철학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소수의 인원으로 하나의 게임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또한 회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시드 마이어는 개발할 시간보다는 조직을 관리하는 시간이 더 많이 들었다.

사업계획이나 경영에도 신경쓰게 되니 갈수록 개발 현장에 있기가 힘들었다.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야말로 최고의 직업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관리자나 경영자는 시드 마이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직 개발 현장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로 게임을 기획하고 싶다는 열망이 갈수록 커졌다.

결국 그는 오랜 고심 끝에 마이크로프로즈를 떠나 소수정예로 게임을 개발할 결심을 한다. 경영이나 관리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오직 현장에서 게임 개발에 전념하고자 했다.

파이락시스를 창업하다새로운 회사를 창립할 결심을 한 시드 마이어가 우선 먼저 생각한 것은 경영자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개발에 전념하고 회사의 경영과 팀 관리를 전적으로 맡을 사람을 원했던 것이다.

마침 같은 회사의 동료인 제프 브릭스(Jeff Briggs)도 소규모 회사에서 하나의 게임에 전념하는 시스템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대규모화된 회사에 염증을 느끼던 제프 브릭스는 공공연히 회사의 운영방침에 반대했다. 자기가 만약 회사를 세우면 우선 3명 정도의 소수가 프로토타입 게임을 완성한 후 게임의 재미를 평가하고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드 마이어는 제프 브릭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고 둘은 금세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회사의 중심은 마케팅이나 경영이 아니라 개발 위주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둘은 파이락시스(firaxis)를 창업한다. 파이락시스의 회사 모토는 우리가 하고 싶고 재미있어하는 게임을 열정을 다해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시장에서 얼마나 팔릴까 보다는 얼마나 재미있는 게임을 개발하느냐가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마침 제프 브릭스는 경영과 관리에 재능이 있었다. 훗날 2004년엔 미국 유력 경제 잡지 스마트CEO매거진에서 올해의 CEO로 뽑힐 정도로 탁월한 경영 수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드 마이어는 다른 일은 신경쓰지 않고 오직 게임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그것은 최고의 게임을 개발하는데 원동력이 됐다. 미국 남북전쟁을 소재로 게임을 개발할 결심을 한 그는 실시간으로 2,000명의 군인을 직접 조작하며 전쟁을 수행하는 게티스버그(Gettysburg)를 만든다.

게티스버그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유저는 장군이 되어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게임이다. 실시간 게임 시스템을 채용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전투의 긴장감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여러 게임 잡지와 웹진으로부터 최고의 전쟁 게임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이어서 1999년에 내놓은 알파센타우리는 문명의 소재를 우주로 끌어 올린 게임으로 덴버포스트와 토론토썬에 의해 최고의 게임으로 선정됐다. 문명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었고 그가 꾸준히 성공작을 내는 크리에이터라는 명성은 더해만 갔다.

2004년 시드마이어는 3D기술을 활용해 자신의 과거 작품인 해적을 리메이크한다. 1987년도 작품을 17년 만에 3D로 부활시킨 해적은 게임성 뿐 아니라 시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략, 액션, 어드벤쳐, 롤플레잉 요소를 하나에 담아낸 복합장르 게임으로 평가받았다. 해적은 시카고트리뷴을 비롯한 각종 언론매체로부터 2004년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되며 맹위를 떨쳤다.

시드 마이어는 갈수록 명성이 빛이 더해지고 있는 크리에이터다. 2005년 11월에 발매한 문명 4에 이어 2010년 현재는 문명5가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시드 마이어의 게임과 삶게임은 흥미로운 선택들의 연속이라는 정의는 게임 개발자들이 가장 즐겨하는 말 중 하나다. 보통 게임 개발자들에게 게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항상 모범 답안처럼 흥미로운 선택들을 연속적으로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필자는 한동안 그 말이 작자 미상의 게임 업계 격언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시드 마이어가 게임에 대해 밝힌 견해임을 알게 돼 놀란 적이 있다.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들의 연속이라는 것은 게임의 특질을 꿰뚫는 명언이다.

게임은 유저에게 한 가지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양한 선택사항을 가지고 그에 따른 여러 결과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 게임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는 게임 기획자에게 게임을 개발할 때 항상 유저들이 흥미로워하는 선택사항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저가 게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명확하게 설명해 쉽게 게임 내용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획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드 마이어는 게임을 개발할 때 장르에 구속받지 말고 우선 소재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먼저 장르를 선택하는 행위는 게임 개발에 있어 창의성이 발휘될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는다는 것이다.

그가 레일로드타이쿤을 기획할 때는 경영 시뮬레이션을 먼저 생각하고 개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철도를 표현할 수 있는 게임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경영 시뮬레이션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게임에 접목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문명이 나왔고 스파이들의 삶을 게임에 표현하고 싶어 만들어진 것이 액션장르인 코버트액션이다.

바다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들고 싶어 생각해낸 해적은 액션, 롤플레잉, 어드벤처, 경영시뮬레이션이 모두 합쳐진 복합장르로 탄생했다. 이렇듯 장르가 아닌 소재를 먼저 생각해서 게임을 기획하라는 것이 시드 마이어의 충고다.

이런 소재들은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많은 책을 읽기로 유명하다. 또한 시드 마이어가 게임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은 자녀들과 함께하는 게임이라고 한다. 서로 다른 컴퓨터에서 각자 게임을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덧 게임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행복할 때 역시 자녀들과 자기가 만든 게임을 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이런 광경은 세상의 모든 게임 크리에이터가 꿈꾸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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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버즈리포터(multiwriter.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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