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생이 학점을 거부한 이유

엄기호 2014. 7. 23. 09: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봄 학기 채점이 끝났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때다. 특히 이번 학기에 한 학교 전공과목의 경우에는 채점하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어느 학기보다 학생들의 참여가 높았다. 수업에 빠지는 학생도 거의 없었다. 한 학기에 네 번 내도록 되어 있는 리포트를 내지 않은 학생도 거의 없었다.

이러다간 채점을 할 때 변별력이 없어질 것 같아서 중간고사 이후에 학생들과 합의를 했다. 성적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도록 기말고사를 '외워서 쓰는 문제'로 할 것인지 아니면 네 번 쓰기로 되어 있는 리포트 중 한 번을 특히 길게 써서 그걸 중심으로 평가를 할 것인지를 놓고 학생들이 결정하라고 했다. 다들 긴 리포트를 원했다. 막상 받아보니 보고서의 내용도 다들 수준급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모두에게 좋은 점수를 줘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상대평가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30%의 학생에게는 무조건 C를 줘야 한다. 출석 다 하고, 리포트 다 내고, 내용도 나쁘지 않은데 C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예전에는 '동점자 처리'라는 것이 있어서 강사가 좀 귀찮게 서류 처리를 하면 고생한 학생들에게 정당한 점수를 줄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어려워졌다고 한다. 동료 교수에게 물어보니 대학평가 때문이란다. 대학평가에 사활이 걸린 대학 당국들이 학점 '인플레'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일이 이 정도 되면 채점은 학생들이 잘한 부분과 모자란 부분을 분별하면서 무엇을 더 보충해야 하는지를 찾아내는 과정이 아니다. '꼬투리 잡기'에 불과해진다. 차이 같지도 않은 차이를 억지로 만들고 그걸 정당화한다.

ⓒ박해성 그림

출석 부실한 학생을 고마워하는 교수

동료 교수 한 분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학생들이 개입하고 참여하는 비중이 높은 수업이었는데, 학생들이 출석을 좀 부실하게 하면 학생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보다 더 반교육적인 것이 어디 있겠냐고 개탄했다. 학생들이 열심히 하면 기쁜 것이 아니라 채점 때문에 미리 걱정해야 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교수와 강사들만 지친 것이 아니다. 학생들도 지친다. 상대평가와 격화된 경쟁 때문에 학생들이 해야 하는 과제가 점점 더 많아진다. 최저임금 겨우 받는 아르바이트 노동을 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수많은 과제를 다 해낼 절대 시간이 부족하고 또 양이 많은 만큼 결과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집안이 여유로운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격차가 노력으로 메우기엔 버거울 정도로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학기에도 수업태도 좋고 기말고사도 잘 봤는데 보고서를 내지 않거나 부실한 학생들에게 전화를 해보면 아르바이트하느라 모두를 성실히 해내기가 힘들었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평가에 '녹다운되어' 과제를 거부하는 학생도 있었다. 이들도 수업을 열심히 듣고 토론도 적극적으로 하던 학생이다.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이 수업만은 성적 걱정하지 않고 그냥 공부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대학에서 점점 더 격해지는 평가에 목매고 사는 것에 완전히 넌더리가 나서 수강 신청할 때부터 아예 학점을 포기하고 공부를 즐기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충분히 수업을 즐겼고 그러니 됐다고 학생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나는 이들을 '평가 거부자'라고 부른다. 용감하고 멋진 학생들이지만 나는 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들이 학점을 포기하는 '용기'를 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 webmaster@sisain.co.kr

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Live - [ 시사IN 구독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