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코딩기계' IT노동자 "우리는 을도 못된다"

2013. 6. 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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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평균 12시간 노동 '잔혹사'… 5~6단계의 하도급 구조 만연

[미디어오늘 김병철 기자]"개발자는 낮에는 업무하고, 밤에는 코딩을 하는 '24시간 코딩기계'가 돼야 한다"

'하루 12시간 이하만 근무하게 해달라'는 개발자의 요구에 원청 사업팀장이 한 대답이다. 이는 자칭 IT(정보통신) 강국이라는 한국의 IT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6일 오후 국회에서는 장하나 민주당 의원과 IT노동조합 주최로 '을이라도 되고 싶은 IT노동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선 IT업계에 고착화된 하도급 구조와 살인적인 노동시간에 대한 생생한 사례가 발표됐다.

특히 노동시간은 상상을 초월했다. IT노조가 지난달 1일부터 20일 동안 온라인에서 전국 1026명의 IT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평균 주간 근로시간은 57.3시간이다. 이는 일주일 중 5일 출근 기준으로 하면 매일 거의 12시간씩 일한 셈이다.

▲ IT노조가 지난달 1일부터 20일동안 온라인에서 전국 1026명의 IT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평균 주간 근로시간은 57.3시간이다.

2006년부터 2년 반동안 농협정보시스템에서 SI시스템 개발자로 일했던 양아무개씨는 연간 약 4000시간을 넘는 과로를 했다고 주장했다. 어떤 병력도 없이 건강하던 그는 지속적인 과로 후 폐렴진단을 받고 결국 오른쪽 폐의 절반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무노동 무임금을 외친 것은 기업입니다. 저는 말 그대로 실행해 주기를 바랍니다. 직원이 연간 4000시간씩 근무하는 회사가 있는 나라가 정상적인 국가입니까?"

H컨설팅 개발자였던 이아무개씨는 "식사 할 시간도 없이, 하루에 2~3시간씩 자고 출근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2007년 64kg이었던 몸무게가 현재 무려 17kg나 줄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개발일정을 빠듯하게 잡은 후 야근을 당연시 하는 IT업계의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득 게임개발자연대(가칭) 대표는 "정해진 기간 안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개발자들은 야근과 철야를 불사하고 있다"면서 "'포괄임금' 계약으로 과노동에 대한 대가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것도 이젠 고쳐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하루의 절반을 일하지만 초과근로수당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IT노조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시간외 근로시간의 정확한 집계와 함께 수당이 지급되는 경우는 10% 수준이다.

양씨에 따르면 농협정보시스템 직원들은 야근을 하더라도 월 8~12시간의 야근 시간밖에 인정을 받지 못하며, 그 이외의 실제 야근 시간은 전산시스템을 입력할 수 없게 차단돼 있다.

나경훈 IT노조위원장은 "야근, 특근 수당을 모두 연봉에 포함하는 '포괄임금' 계약이 장시간 노동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라며 "2013년 72.7%이라는 연봉제 적용 비율이 시간외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산업풍토를 조성했다"고 지적했다.

▲ 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장하나 민주당 의원과 IT노동조합 주최로 '을이라도 되고 싶은 IT노동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이재왕 스마트개발자협회 부회장은 "공장 조립라인은 기계를 늦게까지 가동하면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의 업무는 매번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연구개발 공정"이라면서 "창의성과 업무 효율성은 늦게까지 일한다고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청에 재하청이 이어지는 하도급 구조도 주요한 문제로 꼽힌다. "IT업계 전체 하청 단계를 보면 실무 개발자들은 IT 프로젝트라는 전쟁터의 '무기'"라는 자소 섞인 증언도 나왔다. '갑'이 실제 IT프로젝트를 발주하는 회사라면 대게 삼성SDS와 같은 IT 자회사가 '을'로서 이 프로젝트를 대행한다. '병'은 '을'의 1차 업체로서 실제 프로젝트 수행사다.

'병'에 이어 '정'으로 인력 알선업체가 등장한다. 이들은 소위 'IT 보도방'으로 불리며 외주 개발자들을 소개해주며 매달 중간 수수료를 챙긴다. 마지막 단계인 '무'와 '기'가 실제 개발업무를 수행하는 개발자들이다. 갑을병정무기로 5~6단계의 하도급을 거쳐서 업무가 진행되다 보니 실제 개발자들의 급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 증언자는 하도급이 발생하는 이유는 '기업들이 쉽게 돈 벌고 싶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후, "인력 알선업체가 프로젝트 투입 이후에는 따로 하는 일이 없는 만큼 인력알선 수수료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은 제조업과 건설업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엔 하도급에 관한 규정이 공공부문에 대한 조항 하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장하나 의원은 발주자, 도급, 수급인, 하수급인 등 하도급 관련 용어를 정의하고,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작성토록 하는 내용의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개정안을 이번 달 안에 발의할 예정이다. 개정안에는 도급받은 사업금액 100분의 50을 초과해서 하도급할 수 없도록 하는 제한 조항이 신설된다.

장 의원은 "현행 법은 하도급에 관한 규정이 미흡해서 실효성 있는 법적 규제가 이뤄지지 않는다"면서 "개정을 통해 소프트웨어산업의 불공정한 하도급거래를 방지하고 건전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발의 배경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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