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출근하기 싫어! '회사 우울증' 심각

2009. 10. 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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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밖에선 활기 차지만 회사만 오면 무기력… 직무·승진 등 조직문제나 인간관계 스트레스 커

대기업 영업팀 부장 김태호씨(43·가명)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게 고역이다.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무겁기 때문이다. 열정을 가지고 회사 일에 매진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요즘처럼 일에 치이는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일을 한다고 하는 데도 위에서는 실적을 운운하며 그를 짓누르고 아랫사람들은 왠지 그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성적인 데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할 줄 모르는 그는 말 못할 스트레스로 회사에서의 하루가 1년만큼이나 길게 다가왔다. 호탕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동기생들에 비해 자꾸 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내가 이 회사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밀려 왔다. 그러나 이런 속 타는 감정을 아내를 비롯한 어느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일도 쉽지 않았다. 혼자 끙끙 앓기만 할 뿐이다.

설문조사 직장인 74%가 회사 우울증

'회사 우울증'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회사 밖에서는 활기찬 상태이지만 출근만 하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는 증상을 말한다. '주부 우울증'과 마찬가지로 의학적 용어는 아니지만 직장인들의 심리상태를 반영한 용어 또는 증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최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 6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직장인 우울증 현황' 조사에 따르면 '회사 우울증'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무려 74.4%(466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상반기에 직장인 11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같은 조사에서 직장인 49.9%가 '회사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답한 것에 비해 무려 24.5% 높아진 수치라고 잡코리아는 분석했다. 이는 그만큼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직장인지원전문가협회 회장인 채정호 가톨릭의대 교수(성모병원 정신과)는 "회사 우울증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삶의 거울"이라면서 "지난날 있었던 며느리 우울증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갈등이 심각했음을 보여준 것이라면 회사 우울증의 확산은 그만큼 현대인들이 개인의 행복보다 일 중심 또는 성과 중심의 삶을 살고 있음을 투영하는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진단했다.

경제 불황과 구조조정에 의한 인원 감축, 성과주의 등 대한민국 직장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직장인들을 벼랑에 선 심정으로 내몰았다.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남아 있으면 도둑)도 모자라 삼팔선(38세가 한계)이라는 신조어가 직장인 사이에 유행할 만큼 우리 사회의 고용 현실은 극히 불안하다. 특히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금융 위기는 이 같은 직장인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잡코리아 설문 결과에도 이 같은 사회 분위기는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회사 우울증을 앓고 있는 원인으로 응답자들은 '회사에 대한 불확실한 비전'(47.4%)을 가장 많이 꼽았고, 뒤이어 '내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비전(45.7%)'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업문화에는 문제가 없을까. 탁진국 광운대 산업심리학과 교수는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기업문화가 권위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서 "기업이 종업원의 정신건강, 행복, 희망과 같은 긍정적 부분에 대한 관심이 낮은 것이 조직원들의 회사 우울증을 가중시키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회사 우울증이 증가했다는 것은 곧 직장 스트레스가 증가했다는 얘기다. 직장 스트레스는 일반적으로 승진이나 맡은 업무 등 회사조직과 관련해 발생하거나 회사 내 인간관계에 의해 일어난다. 이 가운데 회사조직과 관련돼 있는 직무스트레스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최근 산업안전공단이 우리나라 근로자 1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직무 스트레스 고위험군'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는 장세진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예방의학과 교수는 "특정 직업군이나 연령, 성별 등에 따라 직무 스트레스 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면서 "직무 스트레스 고위험군은 그만큼 회사 우울증을 앓을 확률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직무 스트레스 고위험군 확률 높아

장 교수에 따르면 ▲남성 직장인에 비해 여성 직장인 ▲30~40대 ▲이혼·사별이나 별거중인 직장인(그 다음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군은 독신자, 스트레스 지수가 가장 낮은 군은 결혼한 사람) ▲간호사 등 3교대 근무자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 ▲주당 40시간 이상 근무하는 사람 ▲공기업에 비해 민간기업 종사자 ▲대규모 사업장에 비해 소규모 사업장 종업원 ▲대인관계가 좋지 않거나 인간관계 폭이 좁은 직장인 ▲다혈질 성격 ▲스튜어디스 등 감정노동자 ▲버스·택시·화물차 운전 등 운송업 종사자 등이 스트레스 지수가 높게 나왔다.

남성 직장인보다 여성 직장인이 직무 스트레스 지수가 더 높게 나오는 이유는 아내, 엄마, 근로자, 며느리 등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더 많은 역할이 여성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증권회사 과장인 이유진씨(34·가명)는 남편과 맞벌이를 하는데 슬하에 유치원에 다니는 6살 된 딸이 하나 있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아이를 씻기고, 옷을 입히고, 아침밥을 먹인 후 8시30분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유치원버스에 태워 보내는 것까지 그의 몫이다. 물론 그 사이에 출근을 위해 자신도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만지고, 옷도 챙겨 입어야 한다. 하루종일 수많은 고객을 상대하며 파김치가 돼 돌아오자마자 이웃집에 맡겨진 딸을 집에 데리고 온다. 외국계 기업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는 남편은 회사 업무로 자정이 다 돼서야 그것도 술에 취해 집에 오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불평하기도 어렵다.

칼퇴근에 회식 자리도 자주 빠지는 그로선 회사 상사와 동료들의 눈치가 보였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잘 챙기지 못하는 마음에 미안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분노감도 싹텄다. 그래서인지 수시로 편두통과 배앓이도 있었다. 그런 어느 주말 이씨의 분노가 남편을 향해 폭발했다.

청소기를 돌리는 이씨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 누운 채 태연히 TV를 보며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돌연 화가 치민 것이다.

이씨는 "당신 뭐하는 인간이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감정이 북받쳤다. 부부싸움이 커졌다. 경제적인 이유로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느 역할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씨는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우울감이 깊어졌다.

전문가들은 회사 우울증이 발생하는 데는 기업의 조직이나 인간관계로 인한 문제뿐 아니라 개인의 소인도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입을 모은다. 장세진 교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은 직장일 수 있지만 그것을 인지하는 개인에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면서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다른 모든 조직원은 잘 지내는데 한 사람만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소양이나 인격 또는 인적 네트워크에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은 것이므로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최근 한 심리상담기관을 찾아온 공기업의 인사팀 대리 박성준씨(33·가명)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평소 그는 부장이 자기만 못살게 굴고 조직에서 왕따를 시키고 있다며 분노를 키웠다. 그런 어느 날 오후 4시에 부장은 "내일 아침 보고해야 할 것이 있으니 자료를 정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씨는 자기도 할 일이 남아 있고 저녁 약속이 있는 상태였는데 부장이 자기만 미워해 뒤늦게 일을 준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싫어요! 못해요! 왜 나한테 자꾸 그러시는 겁니까?"라고 말하며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그는 그날 저녁에 술을 퍼마시며 '부장이 나가든 내가 나가든 사생결단을 해야겠다'며 씩씩거렸다. 심리상담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그는 잠재의식 속에 억압적인 아버지로 인해 생긴 깊은 상처가 자리잡고 있었다. 부장이 자신을 억압하는 느낌이 들자 과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부장에 대한 인지왜곡이 생기면서 부장과 아버지를 동일시해 부장을 미워하게 된 것이다.

부장 입장에서는 박씨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음은 불문가지이다. 전문가들은 박씨의 현상적인 문제보다 마음의 잠재의식을 치유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에게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부장에 대한 인지왜곡도 개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박씨는 자신이 먼저 부장을 살갑고 예의 바르게 대하는 태도로 스스로를 변모시킴으로써 부장과 잘 지내는 사이가 됐다.

조직문제뿐 아니라 개인 소양도 원인

회사 우울증이 증폭되고 만연하게 되면 이는 개인의 불행뿐 아니라 기업의 생산력 저하,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경쟁력 저하를 불러온다. 스트레스가 심각해질 경우 동료 직원과의 화합이 어려울 뿐 아니라 우발적 행동으로 인명 손상을 일으키기도 하고 자살을 행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9월 충북 진천에서 일어난 3건의 연쇄 방화 용의자 송 모씨는 직장생활의 스트레스와 압박감 때문에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실토했다. 또 최근 프랑스에서는 통신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회의 도중 칼로 자살을 기도하는 일도 발생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에 따르면 이 회사에서는 지난해 2월 이후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한 근로자가 22명에 이른다. 국내에서 스트레스와 관련된다고 보이는 뇌심혈관질환과 근골격계질환이 급증하고 있고, 정신과 질환의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아 요양이 승인된 사례 역시 2000년 27명에서 2004년 120명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대한민국 근로자들이 처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2003년 서울백병원 스트레스센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트레스로 인한 한국의 경제손실은 11조3650억원에 이른다. 미국(산업안전보건원 NIOSH, 2004)은 302조7000억원, 일본(후생노동성, 1999) 19조1168억원이다. 또 우울증에 걸린 근로자는 건강한 근로자보다 2배나 많은 결근율을 보이고, 출근시에도 생산성 손실이 7배에 이른다는 게 2000년 예일대가 발표한 연구보고서 내용이다. 그만큼 기업과 국가가 근로자의 스트레스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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