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누가 잉여 '오덕'일까

2010. 7. 3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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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이주일을 웃겼다] 자학 뺑뺑이 < 켠김에 왕까지 >

< 켠김에 왕까지 > 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게임 채널 '온게임넷'이 개국 10주년 기념으로 13시간 연속 중계를 할 정도다. 어떤 프로그램인데? 제목 그대로다. < 천하무적 야구단 > 의 캐스터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허준이 등장해 매번 새로운 게임을 켠다. 게임을 한다. 계속한다. 최후의 미션인 '왕'을 깨뜨릴 때까지 그냥 무작정 한다. 어쩌자고 이런 걸 방송으로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허허실실 재미있다.

처음 등장하는 허준. 뽀송한 얼굴에 양복까지 차려입고 있다. 자신감은 충만해 있고 나름 게임하는 법을 소개해주는 여유도 있다. 그러나 1시간, 2시간, 10시간이 지나도 왕은 나타날 생각조차 안 한다. 얼굴은 거무튀튀해지고 옆에는 부실한 식사의 증거만 쌓여간다. 친구들이 놀러오지만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꾸질한' 화면 위로 더해지는 게임 더빙 스타일의 감정 없는 멘트는 이 폐인의 모습을 더욱 졸렬하게 만든다. 쇼는 감동도 성취감도 없다. 결국 왕을 못 깨고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리얼리티는 있다. 피식피식 터지는 실소는 있다. 한마디로 우리 시대 '잉여'의 기록이다.

'귀차니즘'이 동시대의 삶을 대변하는 단어로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잉여'다. 차고 넘치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상식적으로는 절대 귀찮아서 못할 만한 일을 이상한 집념으로 완수한다. "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차라리 잠이나 자지" "그걸 해서 뭐하게?" 이런 말을 들어야 마음이 푸근해진다. 이상한 자학의 뺑뺑이가 이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음반을 100개 사고 싶다'는 마음으로 똑같은 음반 100개로 방 안을 채운다. 모니터를 꽉 채운 지뢰 찾기 게임을 하면서 지뢰 일기를 쓴다. 물론 잉여스러운 짓들이다. 그러나 감동이 없다. 터무니없음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했고, 반짝이는 창의력이 부족하다. 고전적인 잉여력의 증거인 '새우깡 한 봉지에 몇 개의 과자가 들어 있나 확인해보자' 같은 시도가 참 좋다. 이런 플레이는 여러 네티즌이 분담해 각종 과자 봉지를 분해하게 하는 잉여의 전파도 가능하다. 시험 기간에는 특별히 잉여력이 상승하는지 경쟁적인 잉여 업로드가 이루어진다. 화장실에 유럽 지도를 그린다든지, 책상에 화이트로 한반도 지도를 그려넣는다든지 하는 작업들은, 들키면 야단맞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더 큰 박수를 주고 싶다.

엑셀 프로그램으로 건담을 그리고 채색까지 해내는 동영상은 예술적 감동까지 전해준다. 포토숍이나 캐드 프로그램을 못 써서가 아니다. 핸디캡이 클수록 잉여의 가치는 상승한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잉여상은 프라모델의 부품을 붙여둔 틀만으로 제작한 거대 로봇 모형에 전하고 싶다. 그 정성도 정성이지만, 저 정도의 부품을 모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로봇을 만들었을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틀만 필요했기에 본체 부품은 사서 다 버렸을 수도 있다. 영화 < 매트릭스 > 에서는 인간이 꿈꾸는 에너지를 이용해 세계를 움직이는데, 사실 우리 세계의 에너지원은 1천만 '오덕'의 잉여력이 아닐까?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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