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루 잔해 지킨 문학..시대 양심 '인두질'

2009. 12. 1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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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용산참사 헌정문집

눈물마저 얼어붙은 처절한 현실의 기록

시인 윤예영 등 릴레이 기고 모아 책으로

비 내린 용산4구역, 잔해로 남은 남일당 건물 앞 네거리. 8일 밤 축축한 길바닥, 2009년 1월20일 그 참사의 현장에 작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

겨울 매운바람 속에 그들이 받쳐든 헝겊 펼침막은 고요히 떨렸고, 꾹꾹 눌러쓴 글씨는 결연하고 단단했다. 꽃다지의 노래가 참사의 희생자 이상림씨가 운영하던 레아 호프 앞으로 울려퍼졌다. 오가던 사람들도 이 네거리에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였다.

그 길바닥의 맨앞엔 고 이상림씨의 부인 전재숙씨 등 용산참사 희생자 다섯 명의 유가족들이 자리했다. 그 뒤로 시인과 소설가, 화가와 만화가, 평론가가 차가운 길거리를 빼곡히 메웠다.

전례 없는 '거리의 출간기념회.' 그들이 모인 건 '작가선언 6·9'가 엮어낸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를 유족에게 헌정하고, 책을 판매하기 위해서다. 책의 수익금은 용산참사 추도기금으로 사용된다. 공권력의 용산4가 철거민 살인진압. 남일당 건물 망루로 내몰린 철거민 다섯은 그렇게 불에 타 숨졌다.

시인 윤예영씨, 극작가 최창근씨 등 작가 다섯 명이 전재숙씨 등 유족 다섯 명에게 한 권, 한 권, 책을 헌정했다. 참사로부터 열한 달째, 아직도 검은 상복을 벗지 못한 유족 대표 전재숙씨는 말라버린 눈물로 목이 메었다.

"죽은 사람이 다섯이나 되는데도 죽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유가족들 힘이 부칠까봐 작가들이 글을 써서 알렸습니다. 힘이 나서 더 나아가겠습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명예 회복과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 주세요."

소설가 권여선, 평론가 이선우·함돈균씨가 헌정문집의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괴물이었으므로 괴물 같은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 그 죽음은 … 그분들을 잊는 일은 우리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는 일이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던 평론가 이선우씨가 용산참사 재판부의 판결 대목에서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10월28일 1심 재판부는 용산 농성자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고인들을 두 번 죽였"다.

"부당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길 수밖에 없도록 하고 다시 그 법으로 처벌하는 이 해괴한 악순환 속에서" 희생자 다섯 명의 주검은 320일째 순천향병원의 차디찬 냉동고에 누워 있다.

"불에 그을린 그대로/ 150일째 다섯 구의 시신이/ 얼어붙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다// …/ 그들은 사람이었지만 토끼처럼 몰이를 당했다/ 그들은 사람이었지만 쓰레기처럼 태워졌다/ 그들은 양민이었지만 적군처럼 살해당했다." 지난 6월에 쓴 송경동 시인의 릴레이 기고 시 <이 냉동고를 열어라>는 150일이라는 숫자에 170일이란 냉혹한 시간이 더해졌을 뿐이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용기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권리가 묶여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 자식들의 미래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 모두의 것인 민주주의가 볼모로 갇혀 있다."(<이 냉동고를 열어라> 부분)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이 사회와 국가권력을 향한 문학의 처절한 현실 발언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씨는 "오늘 대한민국에서 법은 폭력의 합리화에 가깝다.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고 적었다. 판화가 이윤엽씨는 "여기 사람이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마음들이 있었다면 용산에서 여섯 분은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썼다.

용산참사 이후 자발적으로 모인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와 극작가 등 작가들은 인터넷 릴레이 기고와 참사 현장 1인시위를 이어왔다. 겨울 용산 거리에서 이들이 차가운 국가권력을 향해 외치고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봐달라고. "비정한 나라에 무정한 세월이 흐른다. 이 세월을 끝내야 한다. 사람의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 '작가선언 6·9'는

2009년 1월20일 용산4가 철거민 '살인'진압사건이 터졌을 때, 작가들은 한국사회 대표적 참극의 하나로 기록될 이 사건 앞에서 문학의 무기력함에 절망했다. '용산은 오늘 한국사회의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상처다.' 소설가와 시인, 평론가 등 자발적으로 모인 문인 192명은 지난 6월9일 '6·9 작가선언'을 발표했다. 구심점을 만들기보다는 수평적으로 연대하는 모임 '작가선언 6·9'의 탄생이다. 그들은 7월부터 용산참사 현장에서 릴레이 1인시위를 계속했으며,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인터넷 매체를 통해 릴레이 기고를 이어갔다.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는 시와 산문, 그림, 판화, 사진 등 그 릴레이 기고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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