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고깃덩이만 안 먹었을 뿐인데

입력 2009. 12. 21. 14:31 수정 2009. 12. 2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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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예슬 기자]

채식주의자인 주훈(맨오른쪽)에겐 회사 회식자리가 고역이다.

ⓒ 국가인권위원회

사실 기사를 쓰기에도 민망하다. 엄격한 다른 '채식주의자'들처럼 고기 성분이 일체 들어가지 않은 채식용 음식을 따로 구입해서 먹지도 않았고, 눈에 보이는 '고깃덩이'들만을 피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10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몸과 마음에서 느껴진 변화는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이글거리는 '육식의 시대'에서 굳세게 '채식주의'라는 가시밭길을 걷는지 이해가 됐다.

채식을 결심하게 된 것은 며칠을 연속으로 '술과 고기'로 이루어지는 모임에 참석한 후 몸이 예전같지 않게 무거워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몸무게도 불과 얼마 전보다 월등하게 불어나 있었다. 하지만 몸무게보다 불쾌히 느껴진 것은 만성적인 소화불량과 복부팽만감, 그리고 끊임없이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감정의 곡선이었다.

그렇다고 마음 먹고 다이어트나 운동을 시작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채식주의'였다. 본래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끊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번에 평소 좋아하던 '밀가루 음식'도 같이 끊겠노라고 다짐했다(안타깝게도 밀가루 음식은 끊지 못했다).

기간은 시험삼아 딱 10일로 잡았다. 이후에는 연말 모임이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고기를 자주 먹는 편이 아니라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채식 첫날, 먹을 게 없다

첫날 아침, 나는 습관적으로 먹던 초콜릿 과자를 물리치고 잡곡밥과 반찬으로 아침을 준비했다. 그런데 냉장고를 열어 보니 의외로 '채소로만 이루어진' 반찬이 별로 없었다. 고등어 조림과 소시지 볶음, 멸치 볶음과 장조림은 일단 제외했다. 남는 것을 보니 두부 반 모와 김치, 무말랭이, 김이 전부였다.

'정통 채식주의자'들은 해산물 액젓이 들어간 일반 김치도 먹지 않고 채식용 김치를 따로 담가 먹는다는 말이 문득 생각났지만, 김치조차 제외했다간 하루 종일 굶을 것 같아 이들로 첫 '채식주의'식사를 마쳤다.

출근 후 점심시간이 됐다. 모두 함께 나가서 점심을 먹기 때문에 회사의 막내인 나에게는 메뉴 선택권이 없었다. 사방에 보이는 고깃집들, 결국 점심 메뉴는 '제육볶음'으로 결정됐다. 다행히도 채소 밑반찬이 많아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밥 한 그릇을 비웠다.

문득 '눈에 보이는 고기'만 피하기도 이렇게 까다로운데, 엄격하게 '비건(Vegun:계란,우유를 포함한 모든 동물성 음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을 고수하는 이들은 뭘 먹고 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채식주의자 동호회를 검색했다.

환경보호·정신 수양 등 다양한 채식의 '힘'

채식주의자 100명이 있다면 100가지 채식의 방법이 있다는 말처럼, 참으로 다양한 목표와 방식들이 있었다. 해물이나 계란, 우유를 허용하는 채식, 혹은 일반 채식보다 더 엄격한 형태로 '오신채(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를 피하는 청구채식(주로 정신적 수양을 목표로 한다), 가열한 음식을 먹지 않는 생채식, 식물이 살아가는 근간이 되는 뿌리나 줄기를 먹지 않고 열매 등으로만 식사를 하는 '프룻(fruit)'채식 등 스펙트럼도 넓었다.

하지만 정말 흥미로운 사실은 채식이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육식의 주재료가 되는 소나 양 등 가축이 되새김질을 하면서 내뿜는 메탄가스는 전세계 메탄가스 발생량의 4분의 1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미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해 육식을 줄였음을 선포했으며, 폴 매카트니도 "지구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채식을 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밖에도 대량 축산산업 체계 안에서의 비인도적인 가축 학살의 문제점 등 '채식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궁무진했다.

채식 3일째, 몸이 달라지기 시작하다

영화 < 웰컴투동막골 > 의 한 장면. 동막골 주민들은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다.

ⓒ 필름있수다

하지만 채식 초보인 나에게 일차적인 관심사는 '내 몸'이었다. 어설프게나마 채식을 한 지 3일째가 된 날, 길을 걷다가 문득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고 느껴졌다. 또 나를 괴롭히던 복부팽만감과 복통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육식이나 인스턴트를 자주 먹던 예전에 비해 적게 먹어도 포만감이 빨리 찾아온다는 점이었다. 배를 채우면 충분히 먹었는데도 음식이 계속 당겨서 이내 과식을 하기 쉬웠는데, 채식으로 밥과 반찬을 먹으면 한 끼 식사로도 더 이상의 음식이 생각나지 않았다. 몸무게를 재 보니 1kg가량 줄어 있었다.

뭐든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지 않겠냐고, 대다수의 '육식인'들은 묻는다. 그러나 '채식'이 건강에 유리함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이미 다각도로 나타나고 있다. 한 예로 인간의 내장은 육식동물에 비해 4배 정도 긴데, 이것은 채식동물과 유사한 형태다. 고기보다 채소를 먹을 때 소화하기 편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인 대구의료원 신경외과전문의 황성수 박사는 지난 9월 21일 제주 한라대학에서 진행한 강의에서 "인간의 모유에는 단백질이 칼로리 비율로 7%밖에 들어있지 않으나 모유를 먹는 어린 아이들은 생후 1년간 모유만 먹어도 체중은 3배, 키는 50%가 자란다"며 어떤 연령대의 사람이라도 7% 이상의 단백질을 섭취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모든 곡식에는 8% 이상의 단백질이 들어 있으므로 그 이상의 단백질을 섭취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반면 동물성 식품에는 칼로리 비율 50%의 단백질이 들어 있어 지나치게 많은 편이다.

7일째, 채식보다 어려운 '밀가루' 끊기

채식을 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고기와 함께 멀리해 온 인스턴트와 밀가루의 유혹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인스턴트는 겉보기에도 '몸에 나빠' 보이기 때문에 멀리하기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밀가루 음식이었다.

겉보기에는 그리 기름기가 많아 보이지도, 고깃덩이가 보이지도 않는 데다 '한 번 손을 대면 멈출 수 없는' 맛 때문에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사실 일반 빵류는 성분에 우유, 계란이 들어가므로 엄격한 채식주의자는 이것조차 먹지 않는다. 대신 식물성 성분만을 사용한 '채식빵'을 이용한다. 물론 원료가 되는 밀가루는 도정된 것이 아닌 '통밀'을 사용한다.

반면 일반 간식용 빵의 경우 설탕, 버터가 과도하게 함유된 데다 정제된 밀가루를 사용하기 때문에 영양가에 비해 칼로리가 몹시 높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탄수화물 특유의 '중독성' 때문에 먹어도 포만감을 쉬이 느끼지 못하고 포식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채식주의자 관련 사이트에도 고기 대신 '탄수화물 중독'에 빠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10일간의 채식,

가장 큰 성과는 '내 몸의 통제권'

그렇게 열흘이 지나갔다. 엄격한 채식도, 긴 기간도 아니었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변화들은 몇 가지 있었다. 밤마다 숙면을 하지 못해 늘 피곤했던 증세가 줄어 잠을 충분히 잘 수 있었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몸이 개운했다.

몸무게는 등락을 반복해 처음과 비교해서 1킬로그램 정도밖에 차이 안 나지만, 옷을 입을 때나 거울을 보면 붓기가 많이 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채식 초기부터 나타났던 포만감과 소화력 개선도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그러나 채식을 하며 가장 좋았던 점은, 내가 먹을 것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명확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현대 사회를 살면서 진정으로 '내 몸이 원하는 음식'을 찾아 먹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대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는 '간편함'과 '맛'을 내세우며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어느새 그들에 중독된 우리의 혀는 습관적으로 '달콤하고, 느끼한' 음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이들의 기계적인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의 즐거움이 따르는 과정이기도 했다. 채식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몸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결국 나는 열흘간의 단기성 채식주의를 마치고 '장기전'으로 돌입할 결심을 굳혔다. 물론 기한은 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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