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영적 기상도 (상)] 생가옆 가톨릭성당은 웅장한데.. '칼뱅은 없었다'

입력 2010. 7. 5. 18:27 수정 2010. 7. 5.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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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종교개혁자 장 칼뱅(1509∼1564)을 배출한 프랑스에서 정작 칼뱅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기독교가 절대 열세이기 때문이다. 1572년 성 바돌로매 축일에 5만여 크리스천들이 무참히 도륙당하는 등 기독교는 항상 소수였다. 최근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 프랑스를 방문해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가는 기독교 상황과 향후 과제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 1일 파리 북쪽으로 120㎞ 떨어져 있는 시골마을 느와용의 칼뱅 생가를 찾았다. 잔뜩 기대 속에서 도착한 기자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웅장한 성당이었다. 1150년 착공돼 140년 만에 완공된 성당이다. 이곳 주교 중 훗날 교황 이노센트 6세와 6명의 성인이 배출됐다. 사제 지망생 칼뱅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주선으로 이곳에서 복사(服事·신부의 시중을 드는 사람)로 활동했다. 성당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칼뱅박물관'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문패가 보였다. 1509년 7월 10일 태어난 칼뱅의 생가는 그림과 판화, 1918년 이전 사진을 추정해 복원됐다.

생가 안에는 칼뱅의 사촌인 올리베탕이 1535년 프랑스어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 1536년 최초의 '기독교강요' 원본 등이 소장돼 있었다. 원본은 가끔 소르본대에서 빌려가 방문자들이 볼 수 없는 날도 있는데 다행히 사진까지 찍을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칼뱅이 꿈꿨던 교회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직사각형이 아닌 원형 성당을 꿈꿨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의미했다. 사막에 피신해 예배드릴 때 사용했던 의자, 칼뱅이 가르칠 때 사용한 의자를 복제한 것도 있었다. 종교개혁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위제 알라드의 1562년 작품 '성경의 무게'도 보였다. 이 작품은 성경의 권위가 어떤 책이나 사제의 권위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생가는 칼뱅의 삶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1553년 2월 그는 편지에서 "내 아버지 집은 파괴된 도시의 잿더미 속에 홀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16∼17세기 종교전쟁 속에서도 잘 보존돼오던 생가는 1918년 독일군에 의해 완전 파괴됐다. 30년 어렵사리 박물관으로 건립됐지만 44년 폭탄테러를 당했다. 54년 재건축을 거친 뒤 83년에야 오늘의 모습이 됐다.

한편 칼뱅이 처음 공부했던 파리에서는 흔적을 찾기 더 어려웠다. 칼뱅이 5년간 수학했던 콜레주 몽테큐는 현재 도서관으로 변했다. 몽테큐는 에라스무스, 예수회를 창설한 이나스 드 로욜라 등이 수학한 곳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제네바'로 불리는 비스콩티 거리가 있다. 칼뱅의 제안에 따라 1559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72개 개혁교회 대표들이 프랑스 최초로 총회를 개최한 곳이다.

그 바로 옆에 프랑스 최초의 목사 장 르 마숑이 안수를 받은 곳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한 자작의 소유로 식당 겸 여인숙이었다. 첫 총회에서 채택된 신앙고백은 칼뱅의 신앙을 반영해 가톨릭의 성인 사상과 연옥, 교회 권력에 대한 비판 등 40개 항목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이 고백으로 인해 수많은 프랑스 기독교인이 죽어가야만 했다.

파리=글·사진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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